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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한국현대사>5.식민지 美化論 왜 증장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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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①일본의 조선통치가 한국 경제발전에 밑거름이 됐다는 주장이 학계에 제기돼 논쟁이 되고 있다.
②생산이 늘면 된다는 사고방식과 일제잔재를 청산하지 못한데서일제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었다.
③식민잔재를 청산해 식민통치를 합리화할 수 있는 토양을 없애고,단순히 경제적 득실만을 따지는데서 벗어나야 「식민지 미화론」을 극복할 수 있다.
해방 50주년을 맞는 오늘에도 일본의 보수정치가들은『태평양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다』『일본식민통치가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식의「망언」을 계속하고 있다.이것은 침략전쟁을 부인하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일본내 보수층의 역사인식 을 보여준다. 이러한 주장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최근에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신흥공업국의 경제성장을 근거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이를 뒷받침하는 연구성과도 계속 나오고 있다.
그중 하나가 식민지 지배를 통해 일제가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는 명확한 근거가 없다는 주장이다.기무라(木村光彦.名古屋學院大)교수는 일본의 조선지배에서 발생한 득실을 비교해 일본인 투자가나 기업가들에게 득도 실도 아니었다고 결론을 내 렸다.들어온돈(물건)과 나간 돈(물건)의 총량을 비교한 결과 일본의 조선경영은 「본전치기」였다는 것이다.
일제시기 공업화가 해방후 경제성장에 기여했다는 주장도 있다.
나카무라(中村哲.京都大)교수는 식민지 조선의 공업화는 경제적 종속을 심화시켰지만,결과적으로 조선인 자본의 형성.발달뿐만 아니라 조선경제 전체를 발전시켰다고 주장했다.그의『 중진자본주의론』은 국내에서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런 주장들을 자료적으로 반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국내 경제사학계 일부에서 알게모르게 이주장들을 수용하고 있다는데 있다.
실제로『일제가 남긴 유산이 경제발전에 주요한 밑거름이 됐다』『일제시기에 조선인 기업가의 경영능력,관료의 국가관리 능력,노동자의 기술향상이 이뤄졌다』는 논의가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들은 우리가 억압받고 수탈당한 것만을 강조하는데서 벗어나일제시기 사회경제의 변화와 해방후에 미친 영향을 주목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그러나 결과적으로 일제식민지=자본주의 성장=근대화라고 하는 결론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일제의 탄압을 몸으로 체험한 세대나「수탈의 역사」로 교육받은 세대 모두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한국 경제성장에 기여했다는 주장이 새롭게 등장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고,그 허점은 무엇인가.
먼저 삶의 질이나 경제발전의 방향과 상관없이 생산이 늘고 소득이 높아지면 된다는 사고방식(생산력 지상주의)을 들 수 있다.물질적 측면을 강조하다 보니 일제시기에 기업이 늘고 공업생산력이 증가한 것에 주목한다.해방후「보릿고개」가 있 던 어려운 시절에는 아무도 일제식민통치가 경제발전에 기여했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오히려 빈곤의 원인이 식민수탈에 있다고 보았다.그런데 한국경제가 고도성장을 하고 물질적 생활이 나아지자 일제시기의 양적 성장조차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 했다.
치나 통계만으로 보면 일제시기에 공장 수와 농업 생산량이 늘고,철도.도로.항만.수리시설등 사회간접자본 투자가 상당히 이뤄졌다.이것만 보면 식민지 조선은 분명히 양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단순히 통계수치로 이해득실을 따질 수는 없다.그렇게 되면 자칫 식민지 지배가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했기 때문에 잘된 것이었다는 결론으로 비약될 수 있다.권태억(權泰檍.서울대)교수는『일제의 통계수치 뒤에 숨어있는 조선민 중의 땀과 고통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게 모르게 제국주의국가들의 식민지 통치를 미화하고,그들의 죄악을 호도(糊塗)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우리 민족이 겪은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돈으로 환산하거나 통계로 나타낼 수는 없다.제방.철도.댐건설등에 5일에서 30일정도 강제동원된 부역노동의 경우 돈으로 환산하면 조세납세액과 필적한다는 추정이 있지만,일제의 어떤 통계에도 그 액수는 포함돼있지 않다.
또 일제시기에 이뤄진 성장의 배경과 누구를 위한 개발인지를 따져 봐야한다.조선인의 돈과 노동력으로 건설된 철도나 일본자본으로 세워진 공장.광업소 등은 수탈과 대륙침략을 위한 것으로 침략당한 주변국 국민들에겐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 줬다. 일제식민통치가 경제성장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나오는 또다른 이유는 해방후 청산되지 못한 일제잔재때문이다.우리는 해방후 정치.경제.사회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일제시기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특히 일제시기의 관료.기업가.지식 인들이 해방후에도 그대로 기득권을 유지했다.이런 역사적 현실이 일제식민통치가 해방후 경제성장에 기여했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일제시기에 자본주의의 성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본 자본주의의 일부분이지「조선인을 위한 자본주의」는 아니다.그나마 그것도 태평양전쟁과 6.25전쟁 기간에 상당부분 파괴됐고,실제 경제성장에 필요한 자본이나 기술은 미국 으로부터 들어왔다.
또 일제시기 조선인의 기술이나 기능의 축적은 동시에「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새로 태어나는 과정이었다.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조선인을 가르치고 성장시킨 것보다 식민지적 차별에도 불구하고 일반민중이 주체적으로 어려움을 뚫고 기술을 배 워나간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일 제시기「경제성장」이 해방후 경제성장에 미친 영향을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은 식민지시기를「억압과 수탈의 역사」로 강조하는 데 머물렀던 역사학계에 반성의 기회를 제공했다.그러나 그 주장이 누구를 위한 근대화인지를 따지지 않고 통계수치나 남겨진 결과만을 강조함으로써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점에서 극복돼야 한다.
우선 단순히 양적 성장이나 경제적 득실을 따지는데서 벗어나야한다.근대화는 생산력 증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근대화는 봉건적모든 것을 청산.극복하는 것을 의미하며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평등이 전제돼야 한다.
또 식민통치를 합리화할 수 있는 토양을 없애고,다시는 그러한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준비도 필요하다.
한해에 1백억달러 이상의 대일(對日)무역적자를 내는 현실에서정상적 韓日관계는 불가능하다.「일본은 없다」고 감정적으로 무시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깊숙이 내면화된 식민잔재를 청산해야 한다.그것이야말로 계속되는 「식민지 미화론」 을 극복하고 대등한 韓日관계를 이룰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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