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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길 떠나는 책 ③ - 박흥용 <호두나무 왼쪽 길로>

중앙일보

입력

두려움, 생애 최초의 길을 나서는 법


“조 선달 편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 달빛에 감동하여서였다. 이지러는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딱 그랬다. 하나 다른 게 있다면, 허생원에게 동이가 왼손잡이라는 걸 확인시켜 준, ‘보름을 갓 지난 달’이 뜨지 않은 것뿐이다. 날이 차고, 전짓불 하나 없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 안으로 사방의 이름 모를 나무들이 우우 몸을 일으켰다. 늘어선 돌담 사이로 드나드는 바람소리가 흡사 숲의 정령이 부르는 노래 같았다. 목적지는 도무지 가늠할 길이 없었다. 중산간 허리에 걸린 길은 진면목을 감춘, 그 모습이 그 모습이었다. 반딧불 하나라도 눈앞에 들이닥쳐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긴장한 소년이 할 수 있는 건, 호주머니에 찔러둔 손에 힘을 주는 정도가 전부였다.
소년이 길 위에서 경험한 건, 생애 최초의 공포였다. 구정 설 전날, 외갓집에서 본가까지의 시골길을 혼자서 찾아오라고 엄명을 내린 완고한 부친 때문이었다. 전봇대도 변변치 않던 시절이었다. 흐릿한 길 탓에 수시로 돌담을 치받은 얘기가 무용담처럼 흘러나오던 때였다. 본가에 들어서자마자 길 위에서 찔끔거린 오줌발을 쏟아내느라 긴긴 시간을 변기 앞에 서 있어야 했다. 긴장으로 달아오른 열기가 한풀 꺾인 등 뒤로 일가 어른들의 “다 컸네, 장하다”라는 공치사가 후렴구처럼 웅웅거렸다. 중학교 시절,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밤길 묘사를 소리 내 읽다가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 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숨이 막힐 지경’인 아름다운 밤길 대신 왜 하필 내 생애 최초의 길은 공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일까? 단지 그런 의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 다른 길이 내게 알려준 무언가가 가슴 한쪽에 똬리를 튼 느낌 때문이었다.
박흥용의 <호두나무 왼쪽 길로>에 등장하는 소년 박상복 역시 그랬을 것이다. 누구나 선택하는 호두나무 오른쪽 큰 길 대신, ‘호두나무 왼쪽 길, 걸어서 낸 협착한 지름길’을 등굣길로 선택한, 용감하고 씩씩한 박상복은 생애 최초의 길로 호기롭게 걸음을 옮긴다. “으하하하 1학년 중에 이 길로 다닌 사람은 영식이 말고 나 밖에 없을 겨.” 호두나무와 동네 지붕들이 좁은 길을 따라 상복의 뒤를 좇는다. 하지만 그 풍경은 함께 재를 넘지 못하고 고개 반대쪽으로 모습을 감춘다. 이제 길 위에 남겨진 건 달랑 상복이 뿐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께 영식이 놈은 반칙여. 지 아부지랑 갔응께. 난 혼자 간다 이거여.” 소년의 호기로움이 길 위에 깔리지만 그건 짧은 메아리 수준도 못된다. 사방은 무섭도록 적요하다. 상복을 따라오는 건 상복의 발자국 소리 뿐, 아무 것도 없다. 반사적으로 발걸음이 빨라진 상복이 단말마처럼 내뱉는 단어는 딱 하나, “할머이”다. 박흥용의 내레이션이 곧장 길 위에 달라붙는다. ‘세 가지 무서운 길. 처음 가는 길. 혼자 걷는 길. 그리고 처음 가면서 혼자 걷는 길.’ 하지만 공포에 쫓겨 자빠지고 무심결에 자꾸 뒤를 돌아보고 아이처럼 잉잉대던 소년 상복은 마침내 큰 길에 다다른다. 그때 상복이를 반긴 건 ‘핏뜩 핏뜩’ 우는 할미새 한 마리였다.
고작 6페이지, 29컷 분량.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중 한 명인 만화가 박흥용은 상복이와 ‘호두나무 왼쪽 길’의 조우만으로도 탁월한 통찰의 단면을 제공한다. 그 탁월한 통찰의 소재는 물론 ‘길’이요, 그 길 밑으로 복선처럼 깔아놓은 게 바로 ‘성장 서사’다. 박흥용에게 길은 성장의 다른 이름이다. ‘호두나무 왼쪽 길’을 빠져나온 소년 박상복이 내처 엄마를 찾기 위해 학교 대신 읍내로 나가는 길을 선택할 때, 박흥용은 이렇게 말한다.
“처음 가면서 혼자 걷는 길이 두렵지 않다면? 미지에 대한 기대가 두려움을 덮을 만큼 커서 그렇겠지.”
엄마를 찾아 또 다른 생애 최초의 길을 선택한 상복의 감정 상태에 대해선 ‘서식지. 호두나무를 벗어난 날개의 흥분’이라고 거든다. 하지만 길은, 성장한다는 건, 그렇게 곧게 뻗어나가지만은 않는다. 때론 꺾이고, 때론 끊긴다. ‘숨이 막힐’ 지경의 감동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공포를 일러주기도 하고, 한없이 지루할 때도 있다. 상복의 첫 결행은 실패한다. ‘호두나무에서 보던 산. 호두나무에서 보던 들. 동네를 까마득히 잊을 만큼 걸었는데 저 똑같은 산과 들 때문에 호두나무를 벗어나지 못한 느낌’ 앞에서 좌절한다.
물론 상복의 길은 여기서 완전히 끊긴 게 아니다. 충청북도 영동군 양강면 지촌리 내궁골 최초로 대낮에도 귀신이 나온다는 호두나무 왼쪽 길을 선택한 1학년 박상복의 ‘길 위의 성장 서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내가 첫 공포를 길 위에서 배우고, 또 다른 길 위에서 여러 가지의 감정을 익혔듯, 상복이 역시 온갖 길 위에서 성장의 진면목을 하나씩 배워나갈 것이다. 길이 끝난 곳에서 다시 길은 시작되는 법이니까. 덧붙여 사족 하나.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생애 최초의 길은?

글 문미루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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