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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노믹스'는 '高大노믹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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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고려대 경영학과의 한 교수는 대선 이후 “표정관리 잘하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이명박 당선인이 졸업했고, 상당수 교수가 MB캠프를 지원한 경제·경영학부 교수들이 새 정부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지 않겠느냐”는 말과 함께다. 그는 “40대 중반까지의 주니어는 별 관심이 없지만 50대 이상 시니어 교수들 사이엔 기대감이 꽤 크다”며 “평소 연구활동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을 정책에 적용해보고 싶은 것은 대부분의 교수가 갖고 있는 희망”이라고 털어놨다.
 
#한 대기업 기획팀은 최근 고려대 경제·경영학과 교수들의 프로필을 모아 파일로 정리했다. 파일엔 출신학교와 전공, 대외활동 경력, 회사 내 지인, 신문 기고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이들이 정부에 직접 참여하거나 자문·프로젝트를 통해 정책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자료수집 차원에서 모아둔 것”이라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출신 학교인 고대, 특히 경제·경영학과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이유는 두 가지다. 당선인의 최측근 인맥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데다, 학문 분야가 ‘이명박 정부’의 지상 과제인 경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당선인 주변의 고대 경제·경영학과 인맥은 김백준(68) 전 삼양종금 사장(자금관리·경제학), 윤진식(61) 전 산자부 장관(인수위 경쟁력강화특위 부위원장·경영학), 장수만(58) 전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장(인수위 경제1분과 위원·경제학) 등이 있다. 학교 안에선 곽승준(48) 경제학과 교수(인수위 기획조정분과 위원·경제학)와 어윤대(63) 전 고대 총장(경영학)이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경제학과의 이만우(58)·강성진(46) 교수와 경영학과의 이두희(51) 교수 등도 대선에서 직간접적으로 당선인을 도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새 정부 각료 후보로 꼽힌다.

 
곽승준 교수가 연결고리

대선을 전후해 가장 주목을 받은 게 곽승준 교수다. ‘이 당선인이 인사는 정두언 의원, 정책은 곽 교수와 논의해 최종 결정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당선인을 만날 때면 대화가 3시간을 넘길 때도 많아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초조하게 한다. 미국 밴더빌트 대학에서 환경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7% 성장과 국민소득 4만 달러로 대표되는 ‘747공약’의 학문적 기초를 제공하고, 이 당선인의 최대 공약 중 하나인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비판을 막아내는 방패 역할을 해왔다. 당선인과 동문이면서 부친이 현대건설 임원을 지낸 인연도 있는 그는 현재 차기 정부의 경제수석 물망에 올라 있다. 새만금과 영월 동강댐의 경제성을 평가하는 등 ‘가치평가’ 분야에 밝지만, 원래 정치성이 강하며 튀는 성격이라는 평도 듣는다. 2004년 여름올림픽 때는 금메달 하나의 가치가 567억원이라는 논문을 써 화제가 되기도 했다.

경제개발론이 전공인 강성진 교수는 후진국 경제개발 및 성장에 대한 논문을 많이 써왔다. 곽 교수의 소개로 MB캠프에 합류했고, 지난해 3월 곽 교수와 함께 ‘한국경제 7% 성장의 필요성과 전제조건’이라는 논문을 펴내 ‘이명박 식 7% 성장법’을 제시했다. ‘규제완화를 통한 투자촉진과 인재양성, 연구개발(R&D) 등을 통해 충분히 7% 성장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게 요지다.

정부의 방만한 예산 집행을 강력하게 비판해온 재정 전문가인 이만우 교수는 이 당선인의 재정 관련 공약을 다듬는 데 일조했다. 어윤대 전 총장은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말 안 해도 잘 알지않느냐”며 이 당선인 지지를 유도해왔다고 한다. 그는 기업 자금을 대대적으로 끌어들이고 교수들에 대한 업적 평가를 강화하는 기업경영 마인드로학교의 경쟁력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처럼 당선인의 주변에 있는 경제·경영학과 인맥이 새 정부의 경제정책 만들기에 활발히 참여하다 보니 “‘MB노믹스’가 ‘고대노믹스’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지나친 확대해석”

당사자인 고대 교수들은 대부분 ‘고대노믹스’란 말에 반감을 나타낸다. 인수위에 참여한 몇몇 사람을 두고 전체의 학풍을 규정하는 건 위험하다는 것이다. 고대 경영학과의 한 교수는 “전체 교수가 80명이 넘고 절반 이상이 학부를 서울대 등 다른 대학에서 마친 사람”이라며 “전공이나 시각도 제각각이어서 한 묶음으로 취급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다른 교수도 “한국의 대학은 각 분야를 섭렵하는 백화점식 전공을 운영하고 고대도 마찬가지”라며 “다양한 시각을 가진 사람 가운데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것일 뿐”이라고 했다. 인수위원 주요 인물 30명 가운데 중 서울대 출신이 15명이고 고대와 연세대 출신은 각각 4명과 3명뿐이라는 점을 들며 고대의 영향력이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반론도 있다.

인수위에 참여한 사람들의 성향도 각론에선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강성진 교수는 성장을 중시하지만 무조건적인 ‘비즈니스 프렌들리’는 아니라는 평을 듣는다. 지난해 3월 한 신문 기고에서 ‘반기업 정서는 기업이 아니라 편법적으로 부를 물려주고 제왕적 지위를 누리면서 책임은 회피하는 기업가들을 싫어하는 반기업가 정서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만우 교수는 1997년 한 논문에서 재산세를 보유세 중심으로 전환하고 양도소득세를 실거래가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두 노무현 정부 때 실행된 내용이다. 1가구 1주택자에 대해 비과세·감면폭을 줄여 과세대상을 확대해야 한다고도 했다. 양도세는 물론 종부세 인하까지 거론하고 있는 인수위와의 차이가 크다.

국가경제의 큰 틀을 맡는 경제학과 출신들이 이명박 정부의 친기업 정책을 주도하는 반면 기업을 도와주는 학문인 경영학과에서 ‘반기업’으로 분류되는 교수들이 많다는 점도 아이러니다. 인수위에 간여하고 있는 곽승준·이만우·강성진 교수가 모두 경제학과인 반면 경제시민운동의 1세대인 이필상 교수와 소액주주 운동으로 유명한 장하성 교수는 경영학과다.
 
“학맥 흐르면 위험”

그럼에도 새 정부에서 고대 경제·경영학과의 역할이 커질 것이라는 데엔 이견이 없다. 당선자와의 인연도 인연이지만, 이들 학과의 분위기도 이를 뒷받침한다. 정주연 경제학과 학과장은 “학문적 성과를 내는 데 매진하는 교수도 많지만, 현실참여하는 교수도 많고 이를 장려한다”며 “대부분의 교수가 인수위에 참여한 교수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한다”고 설명했다. 고대엔 이전부터 라이벌인 연세대에 비해 시민단체에 참여하거나 정부 위원회 위원, 기업의 사외이사 등으로 활동하는 교수가 유난히 많다. 경제학과에선 5공화국에서 경제수석을 한 박영철 교수와 금통위원을 지낸 곽상경·황희갑 교수, 참여연대에서 활동한 김균 교수가, 경영학과에선 이필상·장하성 교수가 대표적이다. 김영세 연세대 경제학부 학부장은 “고대는 정치·경제·통계를 합쳐 정경대로 부르는데 연세대는 경제·경영·응용통계학과로 상경대를 구성해온 역사적인 맥락도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마침 경제·경영학과의 자신감도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는 상태다. ‘고대 법대-연대 상대’란 말이 대표하듯 연세대보다 뒤떨어진다는 오랜 평가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고대 경제·경영학과에 대한 수시모집 경쟁률은 연대보다 많게는 세 배까지 높게 형성돼왔다. 중앙일보 대학평가에서도 6년 전 서울대와 연세대에 크게 뒤처졌지만 지난해엔 압도적 1위로 올라섰다. 타 대학 출신의 실력 있는 교수들을 꾸준히 영입하고 해외 교환학생, 국제인턴십 등 새로운 제도를 과감히 도입해온 게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는 평가다.

문제는 이 같은 분위기에 고대 특유의 응집력이 합쳐질 경우 정책보다 인맥이 부각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고대 인문학부와 경영대학원을 나온 대기업의 한 간부는 지난해 연고전을 앞두고 한 대학원 동문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 학부를 다른 대학에서 마친 그가 ‘왜 고연전 응원을 안 가느냐’고 했기 때문이다. 이달 초 고대교우회 신년하례회에선 ‘이명박 만세’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서울대 출신의 한 경영학과 교수는 “김대중 정부 시절에 고대 출신 김중권 비서실장이 세를 장악한 후 장관 등 고위직 관료를 고대가 싹쓸이한 적이 있고 노무현 정부 땐 연대 출신인 이광재 의원이 부각되면서 청와대 요직에 연대 출신이 상당수 포진했다”며 “특정 학맥이 부각돼 서로 ‘뭉치자 당겨주자’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은 성숙한 사회가 갈 길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박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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