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인터뷰>李勳鍾 선생님이 들려주는 설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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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나지오」도 흔치않던 시절 촌바람을 쐬고 자라 지금 연배가 40대 후반이상인 사람들만해도 대개 어릴적 겨울철 질화로곁에 앉아 묻어둔 고구마를 뒤적이며 할아버지.할머니로부터 구수한 옛날얘기를 듣던 소중한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또 조 금 커서는 동네 말방에서 입심좋은 이들로부터 세상돌아가는 얘기서부터 「남대문 문지방이 대추나무네, 박달나무네」하는 우스개까지 곁들여 듣느라 한 밤이 다 새도록 배를 틀어쥔 적도 많았을 터다.그러나 요즘엔 촌이 아니라 어디를 가도 이 같은 정경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촌이 구석마다 텅 비어 우선 얘기해줄 노인이나 들어줄 어린이들이 없고 그나마 있다손 치더라도 텔레비전이나오락기구 등에 밀려 매력이 없어진지 오래다.그래서 이훈종(李勳鍾.前건국대 문리대학장.7 7)선생이 이 시대의 마지막 「이야기꾼」이라 불리는지 모른다.선생의 얘깃보가 터졌다하면 거미뒷구멍에서 실 나오듯 술술 한이 없다.주제도 「원숭이 엉덩이는 빠알개,빠알가면 사과,사과는 맛있어…」하는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물고 양(洋) 의 동과 서,시(時)의 고금을 넘나들며 막힘이 없다.그야말로 얘기의 화수분이다.
특히 한국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리 낯설지 않은 「우리 것」을 소재로 삼아 사물의 형상과 이치.상황을 해석해 내는 감각과「기술」덕에 같은 얘기라도 李선생의 몸을 통해 나오면 와닿는 느낌이 그렇게 진솔할 수 없다.「둥구미」「자백이 」「방구리」「종댕이」「길마」「용두레」「오금」「곤자소니」「오사리」「기사미」「안잠자기」등 듣기에도 정겨운 용어를 통해 우리네 살림살이가 그대로 묻어나온다.
-학문이 꽤 깊으면서도 학자보다는 이야기꾼으로 더 유명하신데요. ▲이야기꾼은 아무나 되나.이것 저것 아는 것이 많고 분위기도 잘 맞춰주니까 하는 소리들인데 괘념할 건 없어요.그게 다내 삶의 결인데 뭐.좌중의 분위기 바꾸고 하는 거 그거 재간 아닙니까.
-설이 가까웠는데 요즘은 명절치곤 별로인 것 같아요.
▲명절가운데 가장 큰 명절인데 너무 시들해진 것같아 정말 안타깝습니다.제 조부께서 생존하실적에 당숙되시는 분이 80리 떨어진 곳에 사셨는데 걸어서 단 한해도 세배를 거르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감탄하곤 했습니다.요즘에도 남의 부고를 받고 조상(弔喪)을 안하면 절교하다시피하는데 그땐 세배를 안가도 마찬가지로 여겼어요.
-설의 유래는 어떻습니까.
▲원시농경사회에서 하지제와 동지제로 나누어 하늘에 풍년을 빌며 놀던 유습이라고 봅니다.우리나라에서는 동지를 「작은 설」이라고 하는데 농사를 준비해야하는 입춘까지가 너무 멀거든요.그래서 입춘을 전후해 한바탕 놀고 본격적인 새해 살림 을 시작할 수 있도록 날을 잡아 설을 쇠게 된거죠.
-설의 뜻은 무엇입니까.
▲옛날에는 농사고 뭐고간에 모두 자연현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자연히 현상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 무슨 버력이라도 내리는 것이 아닌가 일일이 두려워했을 겁니다.특히 새해를맞는 마당에서는 그 마음씀새가 더욱 그러했을 것 이고 따라서 설이라는 말 자체가「사린다」는 뜻을 지니게 돼 설날을 신일(愼日),달도(도)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지금도 그렇지만 설날 접시하나 깨보세요,큰 일 납니다.
-설의 풍속에는 어떤 게 있습니까.
▲설은 본디 정월대보름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이 기간중 하는풍습은 크게 새해운수를 보는 점(占)과 복(卜)에 대한 기원,재앙을 쫓는 행위등 세가지로 나뉩니다.점에는 뭐니뭐니해도 토정비결이 으뜸이지만 설날아침 대문밖에 나가 첫번째 듣는 소리가 무엇이냐에 따라 길흉을 따지는 청참(聽讖)과 윷을 세번 던져 괘를 삼아 주역의 64괘에 맞춰보는 윷점등이 있습니다.재앙을 쫓는 풍속으로는 대보름날 그동안 날리던 연에 온갖 1년 액을 다 적어 실닿는데까지 풀어 날려버리 는 액막이 연띄우기,사기(邪氣)를 물리치기 위해 나무로 귀신잡는 호리병모양으로 깎아 허리에 차고 다니다 버리는 조롱내기등이 있었습니다.
-대보름날 특히 갖가지 행사가 많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정월 열 엿새 날을 머슴날이라고 해 이날 농사시무식을 하게되니 그전까지 다 놀아야 할 것 아닙니까.보름을 넘겨 윷놀이라도 할라치면 예전에는 「고리백정」이라고 놀림을 받곤했죠.농사를포기한거나 마찬가지로 여긴 겁니다.보름날 아침 일찍 일어나 새를 쫓고 귀밝이술을 마시며 밤.잣.호두등 껍질이 단단한 부럼을까는가하면 밤에는 답교놀이를 하곤했죠.
-참 설동안에는 특히 덕담을 주고받지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언령신앙(言靈信仰)이란 게 있습니다.말에보이지 않는 힘이 있어 그 말대로 사람의 운명을 얽어맨다는 믿음이지요.얼마전 대법원에서 놀림스런 아이들의 이름을 쉽게 고칠수 있도록 한 것도 이런 까닭입니다.왜 말이 씨 된다는 얘기가있잖습니까.
그래서 우리네 조상들은 특히 말에 조심을 강조했고 새해가 걸린 설동안 만큼은 더욱 듣기좋은 말만 하도록 아예 풍습으로 만들어버린거죠.조상의 지혜가 놀랍지 않습니까.
〈李晩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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