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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있는아침] ‘여행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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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여행자’-최금진(1970~ )

그의 구두 뒤축에는 지구의 자전이 매달려 있다

호수에 날은 저물고 웅웅 편서풍이 분다

멀리서 지평선이 언덕을 내려놓고 달을 들어올린다

여행용 컨테이너처럼 그의 몸은 조립식

그는 몸을 펼쳐 텐트를 친다

발목사슬에 달고 질질 끌고 온 세월은

문밖 기둥에 백기(白旗)처럼 걸어놓는다

여기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조개를 건져먹고

어느날은 패총처럼 굳어

자신의 묘비가 될 것이다, 그는 그렇게 편지를 쓴다

하이에나처럼 낄낄거리는 꽃들

그 먹이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에 몸을 눕힌다

무너져오는 어둠의 네 귀퉁이를 손발로 들어올리고

안녕, 너무 늦은 시간이다, 그는 몸을 끄듯 눈을 감는다


알렝 드 보통의 말대로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여행에는 ‘나는 왜 여행을 떠나려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여행이란 정해진 목적지가 있다 하더라도 언제나 애초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묘한 어긋남의 연속이 매력이다. 호수와 지평선과 달과 편서풍까지 자신의 육체처럼 조립하는 한 여행자의 시. 자신이 자신에게 쓰는 저 묘비명의 찬란한 고독. <박형준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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