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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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말투가 거슬렸다.천박하고 자조적(自嘲的)이다.
『좀 품위있게 말할 수는 없어요?』 『품위?』 굴욕감과 노기로 금방 굳어지는 남편 얼굴에서 길례는 눈을 돌렸다.한마디만 더 하면 나올 말은 뻔했다.가출한 어머니 얘기랑 친정 「신분」들먹이는 일이다.
요즘 부쩍 황량해져간다.남편만이 아니라 길례 자신도 그랬다.
부부에게 있어 성생활이란 무엇인가.
분명코 그것이 전부는 아닐텐데 섹스가 빠진 부부생활은 기름기닳아 삐걱거리는 경첩 같아 말문 열 때마다 소리가 난다.
자식 둘을 낳아 남 부럽지않게 키웠고,내년이면 은혼(銀婚)의나이테를 두르게 된다.성생활이 없기로 대수로운 일인가.그것 말고도 할 일은 너무나 많다.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마냥 스산해지는것은 무슨 까닭인가.
불안이 길례를 더욱 부지런히 돌아다니게 만들었다.
아리영과도 서둘러 약속했다.미인도를 보러가기 위해서였다.
정한 날에 대어 약과를 특별히 맞추어 조각보로 곱게 싸서 북악산 골짜기를 찾았다.
무늬를 짜넣은 굵은 털실 스웨터를 입은 아리영 아버지가 반색하며 맞아 준다.
『이거 유밀과(油蜜果)아닙니까! 아주 맛있어 보입니다.당장 들어볼까요?』 티 세트를 손수 날라와 능한 솜씨로 홍차를 마련해 준다.
아리영이 보이지 않아 길례는 부엌쪽을 돌아봤다.
『아리영씨는?』 『아,참.마침 시골 농장서 사위가 올라왔지요.둘이서 가볼 데가 생겼다고 부랴부랴 나갔습니다.죄송하다는 말씀 전해달라고 몇번이나 당부하더군요.오히려 비켜줘서 고맙다 했지요.핫하하….』 미인은 이층 서재 복도 막다른 벽에 모셔져 있었다. 등신대(等身大)가까운 대작이다.
한쪽 손으로 반호장 저고리의 연지빛 고름을 거둬 들고,또 한손으로 종자 무늬 비단 치마를 휘어잡고 있다.치켜진 치맛자락 아래 새하얀 속치마 끝이 살짝 드러나 보인다.저고리 소매의 남빛 끝동과 수혜(繡鞋)의 남빛 코가 이 미인의 유 연한 움직임을 암시해 준다.
청결한 에로티시즘이 감돈다.머리 위와 치맛자락 뒤켠에 안배된흰 매화나무 꽃망울이 그것을 깔끔히 상징하고 있다.
『아름다워요.완벽한 구도인데요.』 이리저리 각도를 달리하면서길례는 꼼꼼히 살피고 자태를 스케치하기도 했다.
『아리영씨 어머님 모습과 흡사하다면서요? 대단한 미인이셨나봐요.』 단정하게 가르마하여 쪽찐 머리와 총기 넘치는 얼굴을 바라보며 길례는 한숨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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