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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으로 환생 신목 … 마을 수호신 “모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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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충북 영동군 상촌면 흥덕리 노인회관 마당에 400년 된 전나무로 만든 장승에 주민들이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색을 칠하고 걸레로 닦아 윤기를 내고 있다. [사진=프리랜서 김성태]

9일 오후 1시 30분쯤 높이 5m짜리 거대한 장승 2개가 서 있는 영동군 상촌면 흥덕리 노인회관 앞.

 이날 흥덕면 주민 100여 명은 장승 앞에 과일·떡 등 음식을 차려 놓고 고사를 지내며 “해마다 풍년이 들고 액운을 막아 풍요로운 마을이 되도록 지켜 달라”고 장승에게 빌었다.

 이어 주민들은 장구·징을 치고 태평소를 불며 신명나는 한마당 잔치를 벌였다.

 높이 50여m, 밑둥둘레 6m가량의 400년된 전나무를 6개월여간 건조과정을 거쳐 목공예가 김종혁씨가 제작한 이 장승은 지난해 12월 말 상촌면 면소재지로 가는 입구에 세워졌다.

 상촌면 주민들은 제막식을 위해 그동안 장승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색을 칠하고 걸레로 닦아 윤기를 냈다.

 주민들이 이 장승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전나무에 특별한 사연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당초 이 전나무는 상촌면 흥덕마을에 심어져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이 나무가 풍년을 들게 해주고 액운을 막아 준다고 믿고 매년 정월 대보름과 추수가 끝나는 11월에 푸짐한 음식을 차려 제를 올리는 등 신목(神木)으로 섬겼다.

 그러나 이 전나무는 지난해 3월 강풍으로 쓰러졌다.

 나무가 쓰러질 때도 인근 주택 2가구를 덮쳤지만 지붕과 창고 건물 일부만 망가뜨렸을 뿐 인명피해를 내지 않은 것도 이 전나무가 영험하기 때문이라고 주민들은 굳게 믿고 있다.

 또 자식을 낳지 못한 부부가 이 나무를 찾아 소원을 빌면 아들을 점지해준다는 전설이 내려와 늦은 밤 몰래 나무 앞에서 간절하게 빌고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는 게 주민들의 얘기다.

 때문에 주민들은 전나무가 쓰러졌을 때도 음식을 차려 놓고 나무의 영혼을 달래는 의식을 갖고 장승으로 만들어 마을 입구에 세우기로 했다.

 전나무는 죽어서도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기 위해 8개월 여만에 장승으로 환생한 셈이다.

 주민들은 전나무가 쓰러진 후 흉물스런 몰골로 남겨진 10여m 높이의 밑동도 마을의 기념물로 보존하기로 하고 8개월 넘게 베어내지 않고 있다.

쓰러지기 전의 전나무 모습.

 강원식(61) 이장은 “이 나무가 장승이 돼 영원히 우리 고장을 지켜주게 됐지만 나무에 대한 주민들의 향수는 가시지 않아 이를 달래기 위해 밑동은 그대로 남겨뒀다”고 말했다.

 백랑기 상촌면장은 “400년간 애환을 함께했던 수호신을 오래오래 곁에 두고 싶어하는 주민들의 염원을 담아 700여만원의 긴급예산을 세워 장승을 깎았다”며 “이젠 장승으로 새 삶을 얻은 흥덕리 신목이 우리 고장의 상징이자 버팀목이 돼 영원히 곁에 남게 됐다”고 말했다.

 장승에는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생명의 고장이라는 의미를 담아 ‘태고의 신비’, ‘생명의 쉼터’라는 문구를 가슴에 새겨넣었다.

 승용차로 경부고속도로 충북 황간 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와 영동군 방향으로 20여분 가면 나타나는 영동군 상촌면은 여름철 피서지로 유명한 민주지산 물한계곡 자락에 있으며 500여 가구에 1600여 명의 주민이 사는 곳감·호도의 고장이다.

글=서형식 기자 , 사진=프리랜서 김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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