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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객석] 연극 '삼류배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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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학로 연극에 혼이 없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적당히 가볍게, 적당히 우습게'를 모범 답안으로 삼기 때문이다. 극단에선 "아니면 손님이 없는데 어떡해?"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삼류배우'의 승부수는 달랐다. '연극성'이란 깃발을 들고 정면승부를 걸었다. 관객의 웃음에는 눈물이 배어났고, 극중 배우의 인생은 관객의 삶까지 돌아보게 했다. 마치 '진짜 소극장 연극의 맛이란 이런 거야!'라고 외치는 듯했다.

'삼류배우'는 줄거리부터 매혹적이다. 30년 동안 단역만 맡아온 마흔아홉살의 삼류배우 이야기다. "남들은 '삼류인생'이라지만 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일류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주연 이영진의 평생 소원은 햄릿역을 맡는 것이다. 기회가 온다. 극단에서 '햄릿'의 주연을 맡긴 것이다. 아내와 딸, 아들은 무척 기뻐한다. 그러나 제작자는 햄릿역을 영진의 친구이자 TV 스타인 상일로 바꿔버린다. 영진은 "한번만 시켜주지. 잘할 수 있는데"라며 꺼져가는 조명 아래서 눈물을 흘린다. 누구나 맛보는 좌절이기에 관객의 공감대는 더 컸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다. "아빠가 하는 '햄릿'을 보고 싶었다"는 아들의 말에 영진은 불꺼진 무대로 달려간다. 그리고 가족을 한명씩 무대 위에 앉힌다. "입장료는 여러분의 사랑, 제가 받을 출연료는 추억"이라는 영진은 딱 세명의 관객 앞에서 '일생에 단 한번뿐인 모노 드라마, 이영진의 햄릿'을 연기한다.

강태기(이영진역)의 열연에 관객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햄릿은 물론 오필리어와 어머니 등 1인5역을 소화하며 혼자서 무대를 꽉 채웠다. 신들린 듯이 토해내는 대사는 무려 15분 동안 이어졌다. 그 속에는 햄릿의 비통함과 영진의 간절함, 그리고 삼류배우를 연기하는 일류배우 강태기의 투혼이 '삼중주'로 녹아 내리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버티는 관객은 아무도 없었다. 모노드라마 햄릿은 '폭풍'이었고, 관객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그리고 하나씩, 둘씩 일어서며 박수를 쳤다. 기립박수였다. 장맛비처럼 쏟아지는 박수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커튼 콜은 세차례나 반복됐다. 땀에 흠뻑 젖은 강태기는 극이 끝난 뒤까지 바쁘게 뛰어다녔다. 소극장 무대에선 이례적인 갈채였다.

'삼류배우'의 감동이 비단 배우 때문만은 아니다. 연극판을 인생의 축소판으로 대입한 김순영의 탄탄한 대본과 연출력도 돋보였다. 주옥같은 대사는 곳곳에 박혀 있다. 햄릿역을 포기하라는 제작자에게 꺼내는 영진의 경마장 대사는 관객의 가슴을 예리하게 엔다. 말과 배우, 경주와 인생을 빗댄 대사는 시(詩)보다 간결하게, 소설보다 장황하게 객석을 때린다.

'진정한 일류 인생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지고 함께 답을 찾아가는 시선이 따뜻하기 그지 없다.

또 "내 인생은 희극이란 말이냐, 비극이란 말이냐"란 햄릿의 독백을 끝내 관객도 되뇌게 만든다. 김순영은 "작품을 통해 쉽게 변하는 세상에서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가는 '우리 시대의 어른'을 그려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소극장을 빠져 나가는 관객들의 가슴마다 '봄비'가 내렸다. 3월 1일까지 대학로 연우소극장. 02-3676-9596~7.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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