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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시너·LP통 … 그곳은 ‘화약고’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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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후 경기도 이천 냉동창고 화재 현장에서 검은 연기가 빠져나오고 있는 가운데 소방관들이 조명을 켠 채 야간 진화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변선구 기자]

 7일 화재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경기도 이천 냉동창고는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창고 지하 1층 내부는 우레탄폼으로 뒤덮여 있는 데다 LP가스통·냉매약품 등 인화성 물질이 널려 있어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특히 폭발에 이은 화재와 함께 창고가 시꺼먼 연기로 뒤덮여 현장에서 작업 중이던 피해자들이 발화 지점 맞은편에 있던 하역장 출입구를 찾아 탈출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유독가스에 암흑으로 변해=냉동설비·전기설비 관계자, 관리자 등 57명은 이날 오전 8시쯤 창고 지하 1층에 들어가 작업을 시작했다. 영업개시일(12일)을 5일 앞두고 전기 작업과 배관 용접 작업, 냉매 주입 작업 등을 진행했다. 화재 직전 창고 지하 1층 내부는 바닥과 벽면, 천장을 마감한 우레탄폼 발포 작업 이후 남은 기름안개로 가득 차 있었고, 폭발성 물질인 200L짜리 우레탄폼 원료 15통과 용접작업용 LP가스통 수십 개도 흩어져 있었다.

 불길은 오전 10시45분쯤 기계실 쪽에서 치솟았다. 이어 10초 간격으로 세 번의 연쇄 폭발이 있었다. 소방방재본부 측은 용접 작업 과정에서 불꽃이 튀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있다. 불길은 LP가스통과 냉매약품, 우레탄폼 원료에 옮겨 붙은 데 이어 건물 벽면 샌드위치 패널을 타고 순식간에 지하 1층 전체로 번졌다는 것이다.

 문제의 냉동창고는 경사면에 지어져 지하 1층의 뒷부분은 지하이지만, 앞부분은 지상의 도로와 연결된 구조였다. 도로 쪽에는 차량으로 보관 물품을 싣고 나를 수 있는 하역장이 설치돼 있으며 출입구 10개가 설치돼 있다. 하역장 출입구 인근에는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별도 출입구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불이 나자 현장에서 작업 중이던 인부들은 발화지점에서 100m가량 떨어져 있는 하역장 출입구를 찾아 탈출하려 했으나 면적 2만3338㎡의 지하 1층 공간은 삽시간에 유독가스와 불길로 가득 찬 생지옥으로 변했다.특히 검은 연기를 내뿜는 유독가스로 창고 내부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하역장 출입구에 가까이 있던 인부들은 건물 밖으로 빠져 나오는 데 성공했으나, 안쪽에서 작업을 하던 인부들은 대부분 당황한 채 유독가스에 질식해 숨진 것으로 보인다고 소방 관계자는 전했다.

 ◆피해 왜 컸나=우레탄은 단열성과 저온특성이 우수해 냉장고용 단열재로 쓰인다. 하지만 불이 붙기 시작하면 유독가스가 심하게 발생한다. 경기도 소방재난본부 조사 결과 우레탄 100g을 화재 시 평균온도인 600도로 가열했을 때 독가스인 시안화수소 420ppm이 발생했다. 이 정도 농도면 가스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는 한 보통 5분 이내 의식을 잃거나 사망한다는 게 소방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차량이 드나드는 출입구가 있었지만 불이 난 장소에서 100m가 넘게 멀리 떨어져 있었다. 또 냉동창고가 6구획으로 나뉘어 칸막이까지 설치돼 있다. 한 소방관은 “희생자들이 화재 직후 쉽게 대피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복잡한 구조였다”고 말했다. 불이 날 당시 지하층에서는 스프링클러도 작동하지 않았다.

◆냉동창고는= ㈜코리아2000의 소유로 대지면적 2만9350㎡에 지상 2층, 지하 1층의 철골구조로 이천시로부터 2007년 6월 건축허가를 거쳐 11월 5일 건축물 사용승인(준공허가)을 받았다. 이천시 호법면 유산리에 위치해 있다. 최근 지하층 내부 냉장·냉동설비 공사를 진행 중이었다.

 ㈜코리아2000은 불이 난 냉동창고를 포함해 이천시 호법면 유산리와 마장면 장암리 일대에 10개의 물류 및 냉장·냉동 창고를 소유하고 있다. 코리아2000 측의 한 관계자는 “냉장냉동 시설 용량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라고 전했다.

 
글=정영진·천인성 기자 , 사진=변선구 기자

◆기름안개(유증기·油蒸氣)=유증기는 휘발유나 시너 같은 기름이 증발하면서 발생한 증기를 일컫는다. 흔히 주유소에서 주유 중에 휘발유 냄새를 맡게 되는 것은 휘발유 유증기가 공기 중에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유증기는 불꽃이나 고열 같은 점화원을 만나면 폭발하기도 한다.

◆샌드위치 패널=얇은 철판 사이에 스티로폼이나 우레탄 등 단열재를 넣어 샌드위치처럼 둘러싼 패널. 냉동창고를 만들 때는 철골구조를 세우고, 여기에 샌드위치 패널을 붙이는 방법으로 시공한다. 단열 효과가 높지만 시멘트나 벽돌에 비해 불에 잘 타는 게 약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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