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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처럼 밀려오는 숫자·텍스트…가상현실서 '인터넷 서핑' 체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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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 04면

ICC에서 전시 중인 ‘케이지(Kage)’에 한 여성 관람객이 손을 대고 있다. 일본 미디어아트 작가 모임인 ‘minim++’의 작품으로 쌍방향 기술을 활용한 것이다. ICC 제공

앞과 좌·우, 3면을 꽉 채운 스크린에서 큰 파도가 솟구쳐 오른다. 손을 뻗으면 파도가 부서진다. 마치 바다 속을 헤엄치는 것 같은 느낌. 계속 팔을 움직이다 보면 어느 순간 새로운 물결이 밀려온다. 파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셀 수 없이 많은 텍스트와 숫자들이 흩어진 채 떠다니고 있다.

‘五感 커뮤니케이션’의 현장, 일본 ICC

일본 도쿄 인터커뮤니케이션 센터(ICC) ‘예술과 기술관(館)’에서 전시 중인 ‘드리프트 넷’(Drift Net·넷 표류하기)이다. 인터넷의 브라우저에서 내려받은 데이터들로 입체 가상 현실을 마련해 놓았다. 인터랙티브(쌍방향) 기술을 활용해 마우스나 키보드처럼 CPU(컴퓨터 중앙처리장치)와 단말기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 없이도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든 것. 스크린 앞에 서 팔과 다리를 움직여 다른 웹사이트로 옮겨 다닐 수도 있다. 말 그대로 ‘인터넷 서핑’을 하는 것이다.

‘드리프트 넷’은 ICC가 지향하고 있는 ‘오감(五感) 커뮤니케이션’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전시 작품. 가게야마 나오키 기획과장은 “지금까지의 예술이 재능 있는 소수에 독점돼 왔다면, 이제는 누구나 첨단 기술을 활용해 손쉽게 자아를 표현할 수 있다”며 “ICC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이 펼쳐지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림자도 변한다? ‘케이지’ 안에 있는 원뿔들을 만질 때마다 눈동자, 비행기, 큰 원뿔(왼쪽부터)처럼 각각 다른 그림자가 생긴다. 권석천 기자

이러한 ICC의 개방 정신은 신주쿠 도심에 있는 오페라시티 빌딩 4층 센터 안에 들어서면 체감할 수 있다. 센터 입구의 로비 오른편에 커피나 차를 즐길 수 있는 카페가 있다. 거창한 박물관이 아니라 시민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생활공간이란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바닥도 나무 재질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그 밑바닥을 보면 1.6m 간격으로 통신케이블과 전력선이 거미줄처럼 깔려 있다. 2000㎡에 이르는 전시공간도 모두 마찬가지. 설계 단계부터 어떠한 모양의 작품도 전시할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전시물 뒤에는 컴퓨터와 각종 센서를 잇는 배선이 정신없이 뒤엉켜 있다. 배선은 보이지 않게끔 해서 자연스러움을 강조했다.

카페 옆 전시공간으로 걸음을 옮기면 ‘인 터치(In Touch)’와 마주친다. 1m 가량 떨어진 두 개의 기둥 위에 나무 목침 같은 장치가 놓여 있다. 가게야마 과장이 장치 속에 있는 롤러에 손을 대보라고 한다. 그가 뒤쪽 장치의 롤러를 밀자 앞쪽 장치의 롤러가 밀린다. 같은 물건을 만지고 있는 것 같다.

“촉각 대 촉각으로 마음을 나누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실감을 못하는데요. 한 사람은 일본에 있고, 한 사람은 한국에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통신선만 있으면 세계 어디에서든 가능한 일입니다.”(가게야마 과장)

동작 센서를 통해 전달된 신호가 수신장치로 옮겨져 구동부를 작동한다는 설명이다. 이를 전구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한다. 유학을 떠난 ‘남친’이 미국 아파트에 들어와 전구를 만지면 동시에 한국 ‘여친’ 방에 있는 전구가 켜지는 식이다.

그 옆에는 ‘셰어 로그’(Sharelog)가 있다. 도쿄도(都) 지도 위에 전체 전철 노선이 그려진 대형 전광판이다. 앞에 놓인 단말기에 교통카드를 갖다 댄다. 초록색 선이 지그재그로 나타난다. 교통카드를 사용한 구간이 지도에 표시되는 것이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나은 법. 자신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계단을 통해 5층에 올라가면 ‘스트리트 스케이프(Streetscape·거리 풍경)’가 자리 잡고 있다. 책상에 홈이 파여 있는 약도가 놓여 있다. 약도는 오페라시티 빌딩 주변의 거리를 그려놓은 것. 헤드 셋을 쓰고 그 홈을 따라 펜을 움직이면, 자동차 엔진소리, 경적 소리,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 거리, 그 골목의 소리를 그대로 들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오롯이 소리로 거리 풍경을 느끼다 보면 머릿속의 상상력이 무한대로 확장돼 나간다.

그 다음은 ‘케이지(Kage)’. 원형 스포트라이트가 바닥에 비치고 가운데 작은 고깔 모자들이 놓여 있다. 원뿔형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상태. 뿔을 하나씩 만지자 그림자가 바뀌기 시작한다. 작은 요정이 나와 춤을 추고, 큰 눈동자가 나타나는가 하면 비행기가 지나가기도 한다. 이것은 진짜 그림자가 아니다. 컴퓨터 그래픽이다. 이 작품의 의미는 그림자가 물체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상식을 깨는 데 있다. 관람객의 손길에 따라 순간순간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는 것이다.

‘모듈로브(Modulobe)’의 경우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잇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터넷 홈페이지에 3D 모형을 조립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사용자들이 자유롭게 갖가지 모형을 만들어낸다. 이들 모형이 ICC의 대형 모니터에 올라오면 관람객들이 재조립하거나 전후좌우로 이동시킨다. 손은 물론 발로 눌러서도 조종할 수 있다.

‘R&D 관’에는 연구·개발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차세대 전시물이 기다리고 있다. IBM 연구소에서 개발 중인 ‘페가 페가(Pega-Pega)’. 작은 방 안에 개구리가 계속 돌아다니고 있다. 천장에 달린 비디오 프로젝터에서 쏜 가상 개구리다. 개구리를 손으로 치면 하얀색 거품으로 변한다.

이 작품은 ‘인터랙티브 디스플레이’ 연구에 기초해 있다. 사용자의 움직임이 센서에 잡히는 동시에 비디오 프로젝터에서 나온 그림이 바뀌는 것이다. 이 기술을 발전시키면 우리의 생활공간 곳곳이 정보교환의 장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책꽂이에 있는 책에 손을 대면 책 내용이 벽에 나타날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ICC를 둘러보는 내내 한 발은 현실에, 한 발은 미래에 두고 그 경계선을 걷는 듯한 느낌이 이어졌다. ‘이제 미래는 단순미래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 아닐까’ 하는 아득함이었다.


* CT 왜 중요한가

스토리와 상상력에 기반한 인간의 감성과 첨단 기술을 융합한 문화기술(CT)의 부가가치가 제조업보다 훨씬 크다. 1997년부터 2006년까지 ‘해리포터’와 우리나라의 수출 주력산업인 반도체의 총매출액을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책·영화·캐릭터사업 등으로 해리포터가 창출한 부(富)는 총 308조원이었다. 같은 시기 우리 반도체 수출 총액 231조원보다 77조원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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