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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길이 1㎞ 바이올린 소리 당신은 들어본 적 있나요?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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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 08면

IRCAM의 공연장은 천장 높이와 벽면 모양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

3차원 특수 안경을 쓰자 눈앞에 펼쳐진 스크린의 초록 풀과 개울이 확 다가오는 듯했다. 스크린 속의 고요한 컴퓨터그래픽 숲, 그 한가운데 청개구리 한 마리가 개골개골 운다. 오른쪽으로 한 걸음 움직이자 눈앞의 풍경이 살짝 바뀐다. “개골개골” 한 걸음만큼 멀어진 개구리 소리도 이젠 왼쪽에서 들린다. 조그마한 스튜디오 한쪽 벽에 설치된 스크린 앞에서 머리에 소형 안테나를 올려놓고, 입체 안경을 쓴 채 발걸음만 왔다갔다했을 뿐인데 청개구리 우는 소리가 맑게 들리는 숲을 산책하는 것 같다.

과학과 음악의 행복한 만남, 佛 IRCAM

“자, 그럼 이번엔 보통 쓰는 스테레오 시스템으로 스피커를 조정해 볼게요.” 에티엔 코틸 박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조금 전까지 기자의 왼쪽에서 들리던 개구리 울음소리가 오른쪽에서 들린다. 개구리는 아직도 기자의 왼쪽에 그대로 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람?

IRCAM의 한 스튜디오에서 첼로 연주자의 동작을 컴퓨터로 기록하고 있다. 프랑스 사진작가인 올리비에 파니에르 데 투슈가 촬영

“스테레오 시스템은 좌우 양쪽의 스피커에서 소리가 나오기 때문에 어느 쪽 스피커에 가까우냐에 따라서 소리의 방향이 달라지거든요.”

코틸 박사는 스피커의 위치와 상관없이 자연 상태에서처럼 이미지의 거리·위치에 맞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연구 중이라고 했다.

실험을 하는 사람이 머리에 올려놓은 주먹만 한 안테나를 통해 스튜디오 네 군데에 설치해놓은 카메라가 움직임을 파악한다. 실험자가 움직이면 이에 맞춰 영상이 변하고 스크린 아래위로 설치해놓은 24개의 달걀형 소형 스피커의 소리도 그에 맞춰 바뀐다.

음향학을 전공한 코틸 박사 외에도 컴퓨터공학·영상·신경과학 전문가 7명이 함께 연구 중이다. 관객이 움직이는 대로 영상과 소리가 따라 움직인다면 어떤 식의 공연이 가능할까. “그건 음악가들이 고민해야 할 몫”이라며 코틸 박사가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프랑스 퐁피두 음악·음향연구소(IRCAM)는 이런 식이다. IRCAM 건물 지하의 8개 스튜디오는 코틸 박사팀처럼 ‘새로운 소리’를 연구하는 과학자들로 분주하다. IRCAM의 현대음악가들은 이들이 만들어낸 소리로 새로운 음악을 창조한다. 과학과 음악의 행복한 만남이다.

“IRCAM은 첨단 기술을 동원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소리를 창조하는 곳입니다. 과학과 음악이 어우러진 유토피아이지요. 이런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시릴 베로스 교육담당 디렉터는 “IRCAM은 음악가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현의 길이가 1㎞나 되는 바이올린이 지구상에 있을까요? 있다 하더라도 연주가 가능할까요? 또 기존 악기로는 낼 수 없는 소리로 음악을 만들고 싶다면요? 예를 들어 하프와 트럼펫, 드럼의 소리를 복합적으로 내고 싶다면 말이죠.” 이 모든 것이 IRCAM의 과학자들이 개발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가능하다. 소리의 특성을 분석·조합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현이 1㎞ 되는 바이올린, 하프·트럼펫·드럼의 소리가 어우러진 새로운 악기 ‘하트럼’의 소리도 만들어낼 수 있다.

악기의 소재·크기·모양을 바꾸는 것도 어렵지 않다. 만들어낸 소리를 바로 음악에 사용하기도 하고, 새 악기를 제조하는 데 참고 자료로도 쓴다. 가상의 공간을 창조해 음악 공연장에서 소리가 어떻게 들릴지도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영화 ‘파리넬리’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IRCAM의 기술을 멋지게 활용한 경우다. 18세기에 활약한 ‘카스트라토’(거세한 남성 소프라노 가수) 파리넬리의 이야기는 매혹적인 목소리로 노래하는 장면이 매우 중요하다. 현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카스트라토의 복합적인 매력을 IRCAM은 카운터 테너의 목소리에 소년과 여성의 목소리를 입혀 재현했다.

실사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때 쓰는 '모션캡쳐' 기능을 활용해 연주할 때의 동작을 정보화하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연주자의 몸과 악기에 센서를 부착해 악기에 주는 압력과 스피드, 동작의 크기 등을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소리를 변용하고 실제 연주에 반영한다. 다양한 소리와 그 소리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분석하는 것이 IRCAM의 주요 작업이다.

컴퓨터를 이용한 작곡도 활발하다. 컴퓨터를 이용하면 작곡 단계에서 자신이 만드는 음악이 어떻게 들릴지 시뮬레이션해볼 수 있다. “한 줄 작곡할 때마다 오케스트라에게 연주해 보라고 할 순 없지 않으냐”고 베로스 디렉터가 미소 지었다. 컴퓨터를 이용한 작곡 방식은 시간을 단축하는 효과도 있다.

작곡가가 사용하고 싶은 음표와 리듬 등을 컴퓨터 프로그램에 입력하면 가능한 모든 조합을 보여준다. 연필과 종이를 사용하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석 달쯤 걸리던 화음 짜는 작업이 불과 몇 분 만에 해결되기도 한다. 작곡가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화음을 제시해 표현의 폭이 넓어지는 경우도 많다.

IRCAM은 소리를 분석하고 조합해, 음악에 사용할 수 있는 소리의 범위를 상상할 수 없었던 영역까지 넓혔다. 하지만 첨단 기술이 꼭 아름다운 음악으로 연결된다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베로스 디렉터도 고개를 끄덕인다. “뛰어난 기술이 반드시 훌륭한 음악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겠지요. 하지만 세상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그 재료를 가지고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곳에서 음악가들이 해야 할 일이지요.”

IRCAM 특별과정에 있는 조현화(31·여·파리고등음악원 작곡과 3년)씨 역시 “기술이 발전할수록 음악가의 재능과 아이디어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술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음악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조씨 역시 서울대 작곡과에 다닐 땐 평범한 악기들을 사용해 작곡을 했다. 하지만 파리에선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기존의 소리를 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음 하나를 완전히 분석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다. 악기라는 개념조차 없다.

“바이올린 소리와 비슷하게 들리는 소리를 제가 만들어낸다고 하더라도 바이올린 소리를 들었을 때와는 느낌이 미묘하게 다른 거죠.”

조씨는 그가 하는 음악을 실제 배우들을 이용한 실사 애니메이션에 비유했다. 얼핏 보면 사람처럼 보이지만 미묘하게 다른 느낌, 기존의 배우가 할 수 없는 동작 등을 통해 일반 영화가 줄 수 없는 묘미를 주는 애니메이션처럼 ‘새로운 소리’로 만든 음악에도 그런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없는 소리를 창조하는 새로운 기술이 젊은 음악가의 손에서 새로운 음악으로 태어나고 있다.


* 이명박 정부의 CT 공약은

이명박 정부는 CT를 이른바 8대 기술집약 산업의 하나로 꼽고 차세대 성장산업으로 집중 육성·추진할 계획이다. 8대 산업은 CT 외에 정보기술(IT), 생명공학기술(BT), 나노기술(NT), 우주기술(ST), 환경기술(ET), 해양기술(MT), 융합기술(FT)이다. 이명박 정부는 다가올 미래는 이들 ‘8T’ 간 기술융합시대가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심각한 일자리 부족을 겪고 있는 청년층에는 CT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콘텐트 산업이 최상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연극·영화·드라마·뮤지컬 등 문화콘텐트를 첨단 IT 기술과 융합해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CT산업 관련 인재 육성과 첨단기술 확보를 정책의 핵심 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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