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봉황처럼 치솟을 대한민국의 힘 담았어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새해엔 이 나라 모든 사람들이 잘 되길 바랍니다.” 엄동설한에도 가마 열기가 뜨겁다. 2007년 한 해동안 국새 만들기에 전념한 민홍규 국새제작단장이 경남 산청 가마 앞에 앉았다. [사진=김상선 기자]

 새해, 새 정부는 새 국새(國璽·나라 도장)로 국정을 시작한다. 정부수립부터 1962년까지 쓰인 1대 국새, 63년부터 99년까지 쓰인 2대 국새, 정부수립 50주년을 기념한 3대 국새에 이은 4번째 국새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라 도장 만들기에 전념해 온 세불(世佛)민홍규(55) 국새 제작단장을 경남 산청에 내려가 만났다. 지리산 자락이 만나는 이곳은 민 단장이 전국을 뒤져 최고 명당으로 점찍은 곳이다. 지난해 8월부터 이곳에 가마를 만들고, 전국 각지서 모은 흙을 합쳐 거푸집을 구운 뒤 그 속에 합금을 넣어 새 국새를 굳혔다. 대한민국 최고 장인들의 숨결이 만들어낸 새 국새 이야기-.

 ‘우르릉, 우르릉’.

 가마 속에서 울리는 소리가 흡사 짐승 울음 같았다. 신문지 한 장에 불을 붙여 가마에 던져 넣자 금세 활활 타올랐다. 거북처럼 웅크리고 있던 불길이 용처럼 휘감더니 봉황처럼 솟았다. 조선의 거북 국새가 황제국을 선포한 대한제국에선 용, 이번 국새에선 봉황이 됐다. 온 국민이 화합하듯 전국서 채취한 흙을 섞어 만든 국새틀, 거푸집은 섭씨 1600도의 가마에서 구워졌다. 금·구리·아연 등 5가지 쇠붙이를 녹인 쇳물로 국새를 품어낸 거푸집이다.

 가마 앞에 앉은 민홍규(55) 국새제작단장의 얼굴이 불볕으로 불그스레했다. 고온에 유독가스를 내뿜는 가마는 쇳물만 녹인 게 아니라 그의 폐와 신장도 집어삼켰다. 그는 1980년대 말 신장과 폐를 하나씩 떼어냈다. 정작 본인은 “이 일 하는 이들에게 흔한 직업병일 뿐”이라며 별 일 아닌 듯 말했다.

 얼마전까지 국새 만들기에 전념했던 바로 이곳, 경상남도 산청군 가마에서 그를 만났다. 생전에 다시 기회가 주어질까 싶은 국새 제작 프로젝트를 마친 감회가 새롭다는 표정이다. 꾸리던 서당 등 다른 일을 접고, 국새 만드는 동안만큼은 남과 시비하지 않고, 언론과의 인터뷰도 사절하고, (국새에 쓰인) 봉황을 닮은 닭 먹기도 피할 정도로 1년간 삼가며 지내왔다. 이렇게 정성껏 만든 국새는 이제 새 정부에서 쓰일 예정이다. 마침 새해다. 새로운 것은 늘 희망과 함께 온다.

 “새해엔 이 나라 모든 사람들이 잘 되길 바랍니다”라는 국새제작단장의 기원은 단순한 덕담이 아니라 철학이었다. “잘 된다 함은 자기 위치 잡고 흔들림없이 나아가는 겁니다. 정치하는 이가 ‘정치 못해먹겠다’, 기업하는 이가 ‘기업 못해먹겠다’ 하는 게 아니라 모두들 제자리서 충실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을 ‘대한민국 유일의 옥새전각장’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무형문화재엔 옥새전각장 분야가 없다. 이번 국새제작단에 참여한 많은 장인들과 달리 정부 공식 무형문화재 혹은 명장 타이틀이 없는 이유다. 왕이 사라진 시대여선지 옥새전각장이 맞느냐는 의심도 받았다.

 민 단장은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중학생이던 15세 때부터 스승인 석불(石佛) 정기호(1899∼1989) 선생 문하에 들어갔다. 석불 선생은 대한민국 초대 국새를 제작한 옥새전각장이다. 옥새는 나라, 곧 왕권의 상징이었다. 조선시대 옥새에 대해 발설하는 것은 금기였다고 한다. 왕실의 도장이 위조되면 안 되므로 철저히 한 사람에게만 그 기법이 비전돼 왔다. 이게 바로 옥새전각장이 제자 한 명에게만 구전해 주는 영새부다.

 스승 밑에서 17년간 동양철학을 비롯해 조각·서예·전각·회화와 주물까지 두루 수학한 그가 1985년 후계자로 채택됐다. 방대한 분야를 익히고, 1600도 뜨거운 가마 앞에서 일하는 게 만만치 않아 도망치고 싶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사라져가는 문화재를 붙들고 씨름한 것이 올해로 40년이 흘렀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현대적 기술로 3대 국새를 만들 때는 제작단에서 제외됐다. 하지만 이 3대 국새가 금이 가면서 국새 제작에 처음으로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민 단장은 2006년말 행정자치부의 ‘4대 국새’ 응모에서 인문(印文·도장 글씨 부분)과 인뉴(印鈕·도장 손잡이 부분) 두 부문 모두 당선됐다.

그가 고안한 인장은 훈민정음체로 쓴 ‘대한민국’. 인뉴는 봉황이 다섯 발가락을 움켜쥐고 고개를 15도 가량 숙여 구름 위에 내려앉는 순간을 담아냈다. “고개를 너무 숙이면 굴종, 빳빳이 세우면 거만이 됩니다. 곧 비상할 채비를 하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인 진취적 기상을 담았습니다”라는 게 민 단장의 설명이다.

 국새제작단장으로 4대 국새 만들기를 총괄한 그에게 지난 일년은 영광이자 도전이었다. 새카맣던 머리와 수염은 지난 일년새 희끗희끗해졌다. 몸과 마음을 혹사해 수도 없이 코피를 쏟아 현기증을 안고 살았다.

 가로·세로·높이 99mm 정방형에서 펼쳐지는 예술, 국새에 그가 1년 내내 응축해 담은 염원은 한 마디로 ‘대한민국의 힘’이다. “나라에서 만들어 쓰는 물건엔 소박·고졸한멋 보다는 화려하고 힘있는 멋이 어울립니다. 강하고 위대해 보이되 국격에 맞게 하려 애썼습니다.”

 그는 공모작에 ‘태평새’라는 이름을 붙였다. “태평성대라는 표현이 봉건적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잘 살면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게 태평성대 아닌가요. 잘 살면서 더 잘 살고자 하고 내가 더 잘 살려고 남 짓밟는 풍토말고, 어려운 이들이 살 수 있는 방향이 제시되는 세상이 됐으면 합니다.”

 전통 종합예술의 정수인 국새 만들기에서 뭐가 가장 중요하냐고 물었다. 그는 주물도 서예도 아닌 철학을 강조했다. “기본기를 닦을 때는 안 보이던 것이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면 바른 철학, 바른 생각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국새 제작을 마친 올해 그의 소망은 경남 산청에 국새전각전을 완성해 전통을 이을 제자를 키우고, 사라진 조선 국새들을 복원하는 것이다.

“일본·중국에서는 이미 국새 만드는 기술이 더이상 전수되지 않지만 우리에겐 궁중 예술의 진수, 국새 만드는 전통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글=권근영 기자 , 사진=김상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