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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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어렵사리 등록해놓고 왜 나오지도 않지요? 애초에 끼어들지 않았으면 딴 사람이라도 공부할 것을….』 서을희여사는 날마다 빈 책상을 챙기며 불만이다.
『나도 아들시켜 대신 등록했으니 큰소리할 처지는 아니지만,모두들 스스로 고생해서 차지한 티켓이 아니니까 소중한 줄 모르는거예요.』 캐시미어 코트의 신사는 서여사의 아들이었다.
그 날 직접 등록하러 온 여성은 길례까지 보태 서넛 뿐이다.
아들로부터 정황을 들은 모양이다.그래서인지,서여사는 길례에겐 처음부터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교과목 중에는 고전문학 강의도 있다.오늘은 고대가요가 소개될차례다. 『저… 죄송합니다만,「정읍사(井邑詞)」라는 우리 고대노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 분은 손 좀 들어 주시겠습니까?』 교수의 말에 절반 가량의 손이 올랐다.서여사와 길례,아리영도 그 중 하나다.그러니까 나머지 절반의 여성들은 「정읍사」가 뭔지도 깡그리 모른다는 얘기다.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것에 너무나 무심한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남아 전해져온 단 하나의 백제(百濟)노래가 바로 「정읍사」입니다.처음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훗날 한글로 적혀 전해온 우리 고대 가요 중 가장 오래된 노래지요.남편이 행상을 나가 돌아오지 않아,그의 아내가 달을 바라 보며 밤길을염려하여 불렀다는 애틋한 사랑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강의는전혀 모르는 사람 수준에서 펼쳐질 수밖에 없다.옛 한글체로 된노래 원문 쪽지 한장씩을 돌리고나서,교수는 낭랑하게 읊는다.
『하 노피곰 도샤/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어긔야 어강됴리/아으 다롱디리/全(전)져재 녀러신고요/어긔야 즌 드욜세라/어긔야 어강됴리/어느이다 노코시라/어긔야 내가논 졈그세라/어긔야 어강됴리/아으 다롱디리』 이 「하」를 요즘의 한글로 고치면 「달아」가 될 것이고,「도샤」는 「돋아사」로 옮겨질 것이다.교수는 계속 해독문을 낭송한다.
『달님이시여 높이 돋으시어/멀리 비춰주십시오/내 님은 시장에다니시던가요/아,진 데를 디딜까 두렵습니다/어느 것이든 다 놓아버리십시오/아,내 님 가시는 데 날이 저물까 두렵습니다』 노래 가운데 「어긔야」와 「아으」는 감탄사,「어강됴리」와 「다롱디리」는 가락에 맞추는, 뜻이 없는 소리라는 설명이 보태졌다.
서여사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뜻이 없는 소리가 왜 이렇게 가지가지로 많고 긴지 이해가 잘 안되네요.그리고 조선조 11대왕 때 기록인 「중종실록(中宗實錄)」을 보면 「정읍사」는 음사(淫詞)로 규정돼 있습니다.방금 교수님께서 해석하신대로라면 음란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데,왜 음사라해서 가사까지 바꿔 부르게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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