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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사후의북한을가다>1.연변 보따리장수 남편으로 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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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취재과정=북한은 참으로 멀고도 먼 곳이었다.
지난 88년12월 첫 방북취재이후 1년7개월만인 90년8월에2차 북한취재를 했고 또 4년여의 긴 노크 끝에 지난해 9,12월 3,4차「북한 엿보기」에 성공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번 3,4차 방북취재는 북한 당국의 공식허가없이「무비자」「변장」등 편법을 통한 잠행이라는 점에서 더욱 힘들고도 먼 느낌을 다시 갖게 했다.
그러나 김일성 사망후의 현지 분위기와 내부 깊숙이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일반주민들의 생활을 감시를 피해 직접 살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위안을 갖는다.
◇3차 취재(9월초순)=90년8월「제1차 범민족대회」취재이후거의 매주 북한당국과 전화접촉을 갖고 재방북신청을 추진했으나 번번이 대답은 「노(No)」였다.
이유는『저서「평양특파원」내용에서 김일성 부자를 욕되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친북한 인사들을 총동원하다시피해 그들과 접촉을 가졌으나「불가」통보뿐이었다.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던가.
마침내 방북 기회가 잡힌 것은 북한 생수개발과 관련된 재미교포 모씨의 아이디어 제공에서 비롯됐다.
뉴욕의 모 교포가 북한과 생수개발 참여 계약을 맺었으나 자금난으로 손을 들어 제2의 투자자를 찾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L&S社라는 유령(?)회사 명함과 공문용지를 인쇄해 생수개발투자계획을 냈다.
일은 쉽게 풀려 8월27일 북측관계자들과 베이징(北京)에서 만나도록 발전했다.
『투자 예정액수가 얼마나 됩니까.』 『3백만~4백만달러 정도로 잡고 있습니다.』 이미 그들의 사정을 알고 있었던 터라 북한측 요구에 접근하는 액수를 내놨던 것이다.
약 1시간의 상담에서 방북계획은 급진전됐다.사실 우리나라 기업들의 북한 물수입 경쟁이 치열한 상황이었기에 현장을 보고 그들과 연계할 한국업체들을 이미 찾아놓은 후였다.
그러나 비자신청후 소요되는 기간이 문제였다.통일전선부.외교부.보위부등을 모두 거치자면 45일 정도는 걸리기 때문이다.
북한사람들도 어지간히 급했던지 베이징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1주일안에 평양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했다.잠깐 생수개발 현장을 답사하면 될터니까 비자없이 밀입국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공식경로를 거칠 경우 말썽꾸러기 남조선「별난기자」임이 들통나 수포로 돌아가겠지만 정말 다행이었다.
9월6일 화요일 북한고려항공편으로 들어가기까지 9일간을 초조하게 베이징에서 대기하고 있었다.그런데 문제가 또 하나 터졌다.한겨레신문 기자가 같은 비행기로 입북할 것이란 소식이었다.
서로 얼굴은 모른다해도 자칫 신분이 탄로날 수 있기 때문에 묘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제일 먼저 탑승해 이쪽에서 그를 피해 움직이는 길밖에 없었다.경쟁이 치열한 우리나라 기자세계에서 한국기자 2명이 같은날 같은 비행기를 타고 함 께 평양으로가다니….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하고도 또 다른 문제는 있었다.마중나오기로 했던 베이징에서 만난 그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아 장시간 비행기 속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게 된 것이다.
입국사증 없이 무작정 침투한 입장에서 앞이 캄캄했다.
유리창을 까만색으로 착색한 승용차가 비행기 트랩입구에 나타난것은 승객들이 다 빠져나가고도 20여분이 지난 뒤였다.
기자를 태운 승용차는 순안비행장 옆문을 유유히 빠져나와 무장군인이 지켜서 있는 특정지역 건물로 들어갔다.
꼼짝달싹 할 수도 없는 특수건물에 감금된 꼴이었다.
「기자인줄 알면서 의도적으로 유인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탈출할 방법은 없을까.」 온갖 불길한 상상들이 꼬리를 물고 뇌리를 스쳐갔다.
3차 북한취재 첫날은 이렇게 시작됐다.
◇4차 취재(12월초)=기자가 다시 베이징을 찾은 것은 10월20일.
우리나라 기업인 3명과 함께 갔다.
방북취재 목적을 위해 비록 사업가로 변신했지만 그들이 애타게추진하려는 사업을 꼭 성사시켜줘야했다는 일종의 책임에서 였다.
이들 기업인과 함께 생수개발계획을 가계약한 뒤 대표로 평양에다시 들어가 정식계약서에 서명한다는 합의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베이징도착 3일만에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평양과 주고받던 팩스가 말썽을 빚어 10월22일 베이징에서 만나기로 했던 북한사람들과의 접촉이 어렵게 됐다.
할수 없이 함께 간 우리나라 기업인들은 24일 모두 되돌아가고 혼자 베이징에 남아 다른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1차 방북취재를 추진할때인 86년부터 꾸준히 줄을 대왔던 모든 경로를 풀가동하는 수밖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러나 남조선 기자의 북한방문 가능성은 역시 「제로」였다.
북한측에 서울로 되돌아 간다는 전갈을 보내고 옌벤(延邊)으로자리를 옮겼다.그야말로 외로운 투쟁(?)을 자청한 것이다.
지난 3차에 걸친 북한취재에서 아쉬운 부분으로 남아있던 것은지도원(감시자)없는 순수민간인과의 접촉을 추진하겠다는 목표였다. 옌벤 조선족 교포들 3명을 임시로 고용해 1명을 함경북도 청진으로,또다른 1명을 평양으로 각각 보내 나진.선봉지역 투자단 파견가능성을 타진했다.
이와함께 나머지 1명은 북한무역관계자들과 접촉케해,함께 베이징으로 갔던 우리나라 기업인들의 주종 취급품인 화강암.수산물.
피복임가공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공무방북을 추진했다.
물론 중국인 신분이라야 가능한 일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 신분증 취득은 대충 세가지 방법이 있음을알 수 있었다.
첫째는 다롄(大連)등에서 가짜 신분증을 통째로 만들어 받는 길.둘째는 실재인물인 중국인 중에서 비슷한 생김새를 찾아 내는길.셋째는 임시신분증을 만드는 일등이다.
신분증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중국쪽 하이관(海關.세관)을 통과할 때 필요한 약간의 중국어 연습이 필요했다.
뿐만아니라 방북성사후에도 기사가 나갈 경우 수속을 도운 사람들이 모두 문책당하는 문제도 심각했다.
또한 강성산(姜成山)북한정무원총리 사위의 탈출이후 중국쪽 세관의 심사가 엄격해졌다는 점도 걸림돌이었다.
姜총리 사위사건과 기타 북한 탈출자들이 속출함에 따라 옌벤역에는 조교(북한측 교포)「특무」들이 깔렸다는 얘기가 파다해 불안은 가중됐다.
옌벤지역에서 입북노력을 하는 동안 조선족들의 보따리장사꾼들과북한을 상대로하는 밀수꾼들을 다수 만나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얻게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조선족을 가장,보따리장사를 위한 입북이 비교적 손쉬운 길임을터득하고 함께 국경을 넘어갈 사람을 찾기 위해 훈춘(琿春).투먼(圖們).허룽(和龍).난핑(南平)등지를 수없이 들락거린 결과30대 초반의「란이엄마」를 소개받았다.
동반방북이 성공할 경우 응분의 대가를 지불키로 했고 그녀는 기자를 무역인으로 알고 있었다.
중국조선족들은 부인을 애인동무,남편을 나그네라고 불렀다.
란이엄마가 기자의 임시 애인동무가 되고 기자는 그녀의 잠깐 나그네가 돼 필요한 수속과 기타 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중국세관 통과를 위한 수속과 중국어 학습,북한측 세관통과와 정치심사를 위한 가족사항 암기와 함께 남한 말씨 고치기등. 그리고 란이아버지로부터 조선족 가장들의 행동거지 전반을 익히며 교육 받았다.
북한에서 판매할 물건들을 구입하고 중국산 의복.내의.모자.신발로「나그네」모습을 꾸몄으나 얼굴에서 남조선 분위기가 자꾸 풍겨나온다고 란이부모들은 걱정했다.
빨랫비누로 세수해 피부를 거칠게 만들어 봤으나 소용이 없어 3~4일 세수하지 않고 면도도 하지않는 것으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안경도 벗었다.
12월초순 어느날-.
『니 지츠 취궈 초우센(북한은 몇번째냐).』 『띠 이츠(처음이다).』 『니쓰 날더런(주소지는).』 『워쓰 ××더(××에 산다).』 『니 또우 날(목적지는).』 『워 또우 ××(××이다).』 미리 손을 쓴 결과이겠지만 중국쪽 통과는 가까스로 넘어갔다. 그러나 북한쪽은 관리들의 눈빛부터 달랐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을 의심하기 보다는 물품의 밀반입 적발에 더 신경을 쓰는 것같았다.
한국기자의 중국국경을 통한 잠입은 이번이 처음이겠지만 지난 10월초 골동품 전문가 2명을 비롯,북한선교를 위한 일부 한국목사들도 이같은 방법으로 북한에 들어간 예가 여러차례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사실은 생각만큼 힘든 일은 아니라 는 것이 조선족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북한쪽 교두 관리들은 보따리 장사꾼을 가장한 북한주민들의 탈출방지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근 2개월을 칩거하며 신문사와 가족들에게조차 연락할 수 없었던 것은 통신을 통한 기자의 위치가 노출될 것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서울로 돌아와서 안 얘기지만 직장과 집안에서는 사고를 걱정한 나머지 북한 억류.실종.사망까지 고려해 난리가 났던 모양이었다.
성공적으로 네번째 북한땅을 밟긴 했으나 적발될 경우 간첩으로몰려 수십년간 억류될지도 모를 위험을 안고 있었다.
영하 20도를 밑도는 차가운 날씨만큼 북한은 정말 모든 면에서 꽁꽁 얼어붙은 동토의 땅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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