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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바둑칼럼>15.관철동시대-中.日 맹주자리싸고 격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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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누가 세계최강자인가.』 서양의 철없는 바둑꾼들은 동양의 프로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물었다.이 질문의 불씨를 던진 사람은 중국인 녜웨이핑(섭衛平)9단이었다.일본은 도쿠가와(德川)막부 이래로 세계바둑의 맹주였고 문부성의 후원아래 세계 곳곳에 바둑을 전파하 면서 『이것은 일본의 독특한 문화』라고 선전해왔다. 그러나 87년무렵 서양바둑꾼의 컴퓨터엔 中.日슈퍼대결에서파죽의 11연승을 거둔 섭9단이 「랭킹1위」로 올라있었다.
일본은 이렇게 대답했다.『그것은 진검승부가 아니다.』 이리하여 中.日의 자존심은 내연하기 시작했다.중국 현대 바둑은 1946년 공산혁명정부 수립 직후 부총리 진의(陳毅)가 『바둑종주국의 위치를 되찾아야 한다』며 초야의 고수들을 불러다 아이들을가르치면서 첫발을 뗐다.그후 40년,문화 혁명의 홍역 속에서도발군의 기재(棋才)인 섭9단,마샤오춘(馬曉春)9단 등이 출현했다.『바둑은 중국이 만든 것이지요.』중국인들은 웃는 얼굴로 이렇게 속삭였다.『일본이 자랑하는 도샤쿠(道策)슈샤쿠(秀策)보다훨씬 이전에 중국에는 왕적신( 王積薪).가현(賈玄).이중은(李重恩)등 전설적인 고수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대(古代)바둑 3걸의 행적을 회상하며 속으로 크게 부르짖었다.『陳부총리의꿈이 이루어지고 있다.이제 누가 최강자인가를 가릴 때가 됐다.
』 상하이(上海)출신의 대만재벌 잉창치(應昌期)씨가 여기에 화답하고 나섰다.70노구의 應씨는 40여년간이나 바둑룰을 연구해온 집념가.
87년 應씨는 총상금 미화(美貨) 1백만달러,우승상금 40만달러라는 파격적인 규모로 세계대회를 창설,88년 베이징(北京)에서 첫 대회를 연다고 발표했다.그는 곧 자신이 선정한 세계 16강에 초청장을 발송했다.
〈중국〉섭衛平.劉小光.馬曉春.江鑄久 〈일본〉후지사와(藤澤秀行).다케미야(武宮正樹).가토(加藤正夫).고바야시(小林光一).하시모토(橋本昌二)〈대만〉林海峰.王立誠.王銘琬 〈한국〉曺薰鉉.趙治勳 〈호주〉吳淞笙 〈미주〉마이클 레드먼드 일본은 깜짝 놀랐다.일본의 권위를 위협하는 세계대회 따위는 하고 싶지도 않지만 꼭 해야 한다면 일본이 먼저 해야 했다.그들은 순발력있게 후지쓰盃 세계대회를 만들어 88년4월,그러니까 잉창치盃보다 한발 먼저 도쿄(東京)에서 개최한다 고 선언했다.
한국도 소란스러워졌다.16강은 중국인이 8명,일본인이 5명,한국인 2명,미국인 1명.소속기원별로는 중국기원 4명,일본기원은 레드먼드5단과 조치훈까지 10명,한국기원 1명,호주협회 1명. 프로기사수가 1백명이 넘는 한국바둑이 바둑 후진국 미국이나 호주와 동일하게 취급당했다.모욕을 느낀 한국은 분개했고 출전을 거부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주최측은 못들은 체 했다.본질적으로 세계대회는 일본바둑에 대한 중국의 도전이었고 한국은 들러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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