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원 용돈 벌려다 … 대선 '알바' 노인들 수십만원 벌금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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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연휴가 시작되던 9월 22일. 서울 광진구 동서울종합터미널 앞을 걷고 있던 송모(72.종로구 창신동)씨에게 40대 남자가 접근했다. 낯선 남자 뒤로 네 명의 노인이 뒤따르고 있었다. 그는 대뜸 "터미널에서 유인물을 나눠주면 일당 5만원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송씨는 귀가 솔깃했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일당 5만원은 횡재라는 생각에 덜컥 승낙했다. 송씨를 비롯한 노인 다섯 명은 낯선 남자가 건넨 '로또 신문'이란 유인물 50여 장씩을 들고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돌렸다.

송씨 일행이 돌린 '로또 신문'은 허경영 대통령 예비 후보의 홍보 선전물로 선관위로부터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 홍보물이었다. 당시는 사전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금지 기간이어서 명백한 불법 선거운동이었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던 송씨 일행은 30분 만에 광진구 선관위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적발됐다. 송씨는 "용돈이나 벌자고 한 일"이라며 "홍보물 배포가 불법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선처를 호소했다.

사건을 수사 중인 광진경찰서는 수사를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나도록 신병처리를 놓고 고민 중이다. 배후가 드러나지 않은 데다 노인들의 처지를 생각할 때 이들을 쉽게 처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송씨 등은 불법 선거운동을 지시한 배후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며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다. 또 경찰이 전화로 출석을 요구하면 "용돈 좀 벌어 보겠다고 한 일인데 며느리나 자식이 알게 되면 얼굴을 들 수 없다"며 선처를 호소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배후 조사 없이 노인들에게 벌금을 물리면 애먼 어르신들이 자식에게 구박받고 가정불화밖에 더 겪겠느냐"며 수사상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선관위에 따르면 과거 비슷한 범죄를 저지르다 적발됐을 경우 50만~70만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선관위 관계자는 "이 경우 공직선거관리법 위반 혐의가 적용돼 2년 이하의 징역이나 4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지는데, 가담 정도를 감안해 벌금이 책정된다"고 말했다.

경찰은 노인들의 이러한 처지를 고의적으로 악용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를 벌이고 있다. 실제 광진서 외에 노원.성동.성북 경찰서에서도 허경영씨의 불법 홍보물 관련 수사를 진행 중이다.

최선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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