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낡은 진보의 패배와 새 진보의 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진보는 왜 패배했는가? 무엇보다 진보개혁 세력을 기반으로 집권한 노무현 정부의 실패 때문이다. 권위주의와 정경유착 청산 등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인사실패, 대통령과 그 참모들의 오만과 독선, 미숙한 국정운영과 같은 정치 실패로 인해 진보개혁 세력을 대표하는 참여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특히 대통령이 보수세력을 끌어안는 폭넓은 정치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사회 갈등을 해소할 사회적 대타협을 도출하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가운데, 문제를 해결하는 최종적 조정자보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논객이 됨으로써 국정 최고책임자로서의 권위를 스스로 실추시킨 것이야말로 정치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원인을 열거하자면 지면이 모자랄 정도다. 대북정책에서 보여준 것처럼 국민의 평균적 정서에 반하는 정책, 부동산 정책에서 드러난 바와 같은 대중의 실생활과 동떨어진 정책, 서민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는데도 장기적 정책 설계에만 치중해 민생 회복에 실패한 경제정책 등은 참여정부로부터 민심을 이반시킨 대표적 정책 실패 사례들이다. 대학입시 3불정책 고수와 같이 기회균등보다는 결과적 평등에 집착한 점, 국가보안법 폐지와 같은 집권 초기의 이상주의적 개혁주의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과 같은 집권 후기의 현실주의적 자유주의 사이에서 동요한 점, 재벌 개혁과 같은 경제민주주의와 규제 완화와 같은 신자유주의 사이에서 오락가락한 점 등은 진보개혁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 정책 실패의 모습들이다.

민주노동당은 여전히 낡은 이념과 전투주의적 활동 방식을 청산하지 못하고 친북 성향을 보인 까닭에 국민적 지지는커녕 다수 노동자의 지지도 얻지 못하고 그 세가 위축됐다. 신생 정당인 창조한국당은 ‘사람 중심 경제’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미래진보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조직력과 정치력의 부족으로 대안적 진보 세력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민주노동당의 기반인 노동운동이 국민으로부터 고립돼 있고 창조한국당의 기반인 시민운동은 과거에 비해 활력이 크게 떨어져 있다.

그렇다면 진보개혁 진영에 과연 희망은 없는가? 그렇지 않다. 진보가 살아나려면 실패한 낡은 진보와 단절하는 용기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 국민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새로운 진보의 비전과 정책 프로그램을 제시한다면 다시 집권세력이 될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보수 우세 정치지형 속에서 중도보수의 이명박 정부와 경쟁할 수 있고 수권 능력을 가진 중도진보 정당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 새로운 중도진보 정당은 국민의 실생활과 평균적 정서에 기초한 정치와 정책을 펴는 실사구시의 진보 노선을 견지해야 한다. 21세기 세계화와 지식기반경제 시대에 진보적 가치인 자율·연대·생태의 가치를 지향하면서도 시장경제의 역동성과 세계화의 긍정성이 충분히 발휘되게 하는 정책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 복지와 인권을 강조하면서도 성장과 안보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진보, 햇볕정책을 강화하면서도 인권 문제 등 북한 체제의 부정성을 비판하는 진보의 길을 가야 한다. 그리하여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낡은 진보에서 환골탈태하여 국민을 안심시키는 희망의 새로운 진보로 거듭나야 한다.

김형기 경북대 교수·좋은정책포럼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