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슨 병에 걸릴까' DNA는 알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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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사이언스 20일자는 '인간 유전자 변이'를 올해 가장 뛰어난 연구 성과로 꼽는 등 '올해의 10대 과학'을 발표했다. 인간 유전자 변이는 개인 간의 차이를 만들고 질병에 걸릴 위험조차 다르게 한다는 연구 결과가 각국에서 속속 이어지면서 1위를 차지했다. 사이언스는 매년 말 그 해에 가장 뛰어난 연구 업적을 선정해 발표해 왔다.

박방주.심재우 기자

(1) 인간 유전자 변이

개인마다 DNA의 염기 서열은 다르다. 똑같은 기능을 하는 DNA 부위라고 해도 사람에 따라서는 한두 개의 염기가 없거나 뭉텅이로 추가돼 있기도 하다. 올해 세계 과학자들은 그런 DNA의 차이가 개인의 성격과 질병에 걸릴 위험마저 다르게 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런 성과는 의사가 환자를 어떻게 치료할지, 개개인은 자신의 유전자가 어떤 질병에 강하거나 약한지 등의 유전 정보를 알 수 있게 한다. 올해 최고의 연구 성과는 DNA의 작은 부위의 차이(단일염기 다양성)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속속 밝힌 것이다. 어떤 부위의 염기가 있거나 없으면 어떤 질병에 잘 걸리거나 안 걸릴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 하버드대 등 세계 10여 곳의 연구센터가 참여해 폐암 유전자를 찾아내는가 하면, 스웨덴과 미국.싱가포르 등 국제 공동 연구진은 류머티즘성 관절염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밝혀내기도 했다.

또 영국과 캐나다 연구팀은 결장암 유전자를 찾아냈으며, 한 연구진은 당뇨병을 일으키는 두 개의 유전자를 알아냈다. 올해 밝혀진 질병 유전자는 이들 질병을 포함해 심장병.고혈압.유방암.자가변역질환.자폐증 등 10여 가지에 이른다. 2001년 인간지놈 지도가 완성된 이후 그 결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연구 성과에 힘입어 개인의 유전 특성을 하나의 CD롬에 담아 주는 사업까지 나타났다. 개인의 DNA 염기 서열이나, 개인의 질병 가능성을 알아 볼 수 있는 단일염기다양성 정보를 담아 파는 것이다. 이 사업에는 인간지놈 지도 완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미국의 크레그 벤터 박사가 가장 먼저 나서고 있다. 이에 따라 개인의 유전적인 정보가 상업 시장에 나돌아 다닐 것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2) 피부 세포로 만든 배아 줄기세포

미국 위스콘신-메디슨대 제임스 톰슨 교수팀과 일본 교토대 야마나카 신야 교수팀이 인간의 피부세포의 생체시계를 거꾸로 돌려 배아 줄기세포를 만들었다. 배아 줄기세포는 인체의 220여 가지의 장기세포로 커 갈 수 있는 만능 세포로 미래 인류 질병 치료의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배아 줄기세포는 난자와 정자가 결합한 수정란에서 추출했었다. 이 방법은 생명을 파괴한다는 종교계의 거센 반발을 사 왔다. 올 들어 두 연구팀의 윤리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길을 열었다는 데 그 의미가 크다. 난자를 사용하거나 수정란을 파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정자와 난자를 사용해 만든 배아 줄기세포의 단점 중 하나인 면역거부 반응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환자 자신의 피부세포로 줄기세포를 만든 뒤 고장 난 장기 치료에 사용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상용하려면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배아 줄기세포에서 나타나는 암세포와 같은 기능을 억제하고, 원하는 장기로만 커 가도록 해야 하는 등 한두 가지가 아니다.

(3) '우주의 총알' 고에너지 우주선 추적

지구에는 우주로부터 우주선(宇宙線)이 쏟아진다. 그중에서 에너지가 아주 높은 우주선도 포함돼 있다. 고에너지 우주선은 세계 곳곳에서 흔치 않게 관측되고 있지만 어디에서 오는지, 그 정체는 무엇인지 베일에 가려져 있다.

물리학자들과 천문학자들이 아르헨티나와 미국의 천문대에서 초고에너지 추적에 나서고 있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그럴듯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가장 먼저 아르헨티나의 천문대에서 연구하고 있는 피에르 어저팀은 60엑사전자볼트(EeV)를 넘는 고에너지 우주선은 없었다는 관측 결과를 7월 처음 발표했다. 물론 지금은 그 이상의 고에너지 우주선을 관측하고 있다. 어저팀은 11월 고에너지 우주선이 어떤 은하계의 중간에 위치한 거대한 블랙홀로부터 발산되는 것 같다고 학계에 보고했다. 그 블랙홀들은 지구로부터 약 2억5000만 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피에르 어저 천문대는 24대의 망원경과 물을 담아 만든 1500개의 우주선 탐지기를 3000㎢에 펼쳐놓고 고에너지 우주선을 검출하고 있다.

(4) 세포막에 떠다니는 수용체를 보다

호르몬의 일종인 아드레날린과 반응하는 세포막 수용체의 구조가 벗겨졌다. 세포막에는 수많은 단백질이 떠다닌다. 아드레날린을 비롯한 수많은 신호를 세포 밖에서 안으로 전달하는 역할이다. 그동안은 이 같은 수용체의 구조를 완벽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워낙 여러 종류의 단백질이 엉켜 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관심이 컸던 '베타2-아드레날린성' 수용체의 구조를 어렵게 밝혀낸 것이다. 그러나 단백질 구조분석학자들은 "앞으로 밝혀야 할 구조가 1000개가 넘는다"고 말한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라는 의미다.

(5) 실리콘 다음은 전이금속 산화물

한 시대를 풍미한 실리콘에 올해 전이금속 산화물이 차세대 반도체로서 도전장을 내밀었다. 전이금속 산화물은 1986년 매우 높은 온도에서 초전도체 성질을 띠는 금속으로 알려졌다. 고체물리학자들이 전이금속 산화물의 성질을 집중적으로 파헤치는 동안 서로 다른 전이금속 산화물을 쌓아올릴 경우 '초격자 구조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서로 다른 전이금속 산화물은 각 층간 상호작용을 통해 물질의 특성이 완전히 바뀌기 때문에 신소재 개발에 유용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6) 전자의 스핀을 조절한다

물질의 기본 단위는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된 원자이고, 원자의 성질을 규정하는 전자는 전하와 스핀으로 구성된다. 극저온 상태에서 강한 자기장을 줄 경우 전자가 '양자스핀 홀 효과'로 불리는 일정한 행동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금속의 배열에 따라 전자의 스핀을 원하는 방향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현상을 실생활에 응용하면 새로운 형태의 컴퓨터 시스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금은 극저온에서만 일정한 결과를 낼 수 있지만, 상온에서도 전자의 스핀을 정확하게 조절할 수 있다면 대용량 컴퓨터의 출현도 가능하다.

(7) 적을 물리치기 위한 비대칭 분할

체내에 병원균이 침입하면 면역세포의 일종인 T세포는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 일부는 침입자와 전투를 벌이는 세포로, 나머지는 이물질의 모양새를 기억하는 세포로 분화한다. 전자는 수명이 짧고, 후자는 긴 편이다. 이 같은 분화를 위해서는 T세포가 성질이 다른 두 가지 세포로 나뉜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올해 이 같은 비대칭 분할의 비밀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 T세포가 분할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면역세포인 덴드라이트가 존재해야 하는데, 덴드라이트에 가까운 쪽에서 분할한 T세포가 침입자의 정보를 소상하게 알고 있어 전선에 곧바로 투입된다는 것이다.

(8) 고효율 화합물 합성

우리 사회가 에너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화학자들에게는 지금까지 물질을 보다 효율적으로 합성하는 게 최대 목표였다. 합성 과정이 짧아야 경제적이다. 지금까지는 탄소로 이뤄진 뼈대에 연결된 다양한 반응그룹을 변화시키면서 물질을 합성했지만, 올해 이스라엘의 연구팀은 뼈대만 남기고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는 효율적인 방법을 알아냈다. 루테늄 금속을 촉매로 사용했다. 캐나다에서는 이 같은 방법으로 링 구조의 화합물을 하나로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9) 하나씩 밝혀지는 뇌 해마의 비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는 상상력이 풍부한 뮤즈를 낳았다. 기억력과 상상력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올 1월 영국에서 해마를 다쳐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들을 상대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이 환자들은 미래를 상상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건강한 사람이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거나 미래를 상상할 경우 해마를 포함한 동일한 부위가 활성화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결국 기억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의 짜깁기이고, 이를 토대로 미래를 그려볼 수 있다는 것이다. 기억은 상상의 어머니가 분명하다.

(10) 인간이 못 이기는 서양장기 SW

서양장기의 일종인 '체커'의 모든 수를 꿰고 있어, 절대 지지 않는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올 7월 캐나다 학자들에 의해 개발됐다. 인류를 상대로 '게임 오버'를 선언한 셈이다. 캐나다 연구팀이 18년 만에 개발한 소프트웨어로, 절대 실수하지 않는 고수를 만나더라도 비길망정 지지는 않는다. 최고 10개의 말이 올라올 경우 생길 수 있는 모든 조합의 수 39조 가지가 모두 입력된 상태다. 흑을 잡든 백을 잡든 상관이 없다. 이 같은 프로그램은 다양한 방면에서 응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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