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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 반대가 7만 표이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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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런데 500년 전 왕조시대에 이미 국민투표가 행해졌으니 놀랄 일이다. 그것도 한반도에서다. 역시 성군은 다르다. 세종대왕이 아니면 누가 하겠나 말이다. 조선 초 조세제도는 관리들이 직접 논밭에 나가 작황을 살펴보고 합당한 세금을 매기는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이었다.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뇌물과 인정에 따라 세금을 늘리고 줄이는 아전들의 장난질이 심했다. 이런 폐해를 막고자 호조에서 전답 1결마다 10두씩 일괄적으로 걷는 공법(貢法)을 건의했다. 임금은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명한다. “서울과 각도의 전·현직 관리로부터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를 물어 아뢰게 하라.” 세종 12년(1430) 3월 5일의 일이다.

이 투표는 거의 반년에 걸쳐 시행되는데 도별 찬반 득표수를 실록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대체로 기름진 땅 경상·전라도에서는 찬성이 많고 거친 땅 함경·강원도는 반대가 다수였다. 셈하니 찬성이 9만8657명, 반대가 7만4149명이었다. 농사가 국가경제의 근본이던 시대상황과 당시의 인구를 고려할 때 17만2806명은 전체 유권자를 대변하기 충분한 수치였다.

찬성이 많았지만 반대도 만만치 않은지라 쉽사리 결정하기 어려웠다. 경상·전라도에 공법을 시험 실시해 본 뒤 문제점을 보완해 1444년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과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으로 공법이 완성된다. 농사의 풍흉에 따라 9등급,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눠 일정률의 세금을 부과한 것이다.

새삼 역사 공부를 하자는 게 아니라 내일이 대통령 선거일이라서 하는 얘기다. 이번 대선처럼 웃기는 선거는 다시 없을 듯하다. 대선 역사상 가장 많은 후보가 나섰어도 딱히 뽑을 사람이 없다는 소리가 들린다. 앞선 주자가 있긴 한데 그 역시 저 잘나서가 아니라 남들이 못나서란 세간의 평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선거 전날까지 삐걱 걸음을 걷는데 뒤처진 후보들은 고개조차 안 보인다. 선두가 반칙했다고 질러 대는 아우성뿐이다. 이런 식이라면 선거가 끝나도 결과에 불복하는 사태가 없다고 장담할 수 없겠다. 딱한 건 유권자들이다. 흥이 날 리 만무하다. “반드시 투표하겠다”는 사람이 67%에 불과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실제 투표율은 그보다 떨어지는 게 보통이란다. 지난 16대 대선에서도 그랬다. 81%가 꼭 투표하겠다고 했는데 실제 투표장을 찾은 사람은 71%에 그쳤다. 그렇다면 이번 투표율은 60% 밑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안 될 일이다. 어쨌든 앞으로 5년 동안 이 나라를 맡길 사람을 뽑는 선거다. 거창하게 한반도의 미래까지 내다보기는 어렵더라도 당장 내 주머니 사정과 내 자식의 교육과 취업, 내 집 마련, 내 노후생활에 불가불 영향을 미칠 사람을 가려 내는 선거다. 맘에 드는 후보가 없더라도 투표권을 행사해야 하는 이유다. 나와 내 자식의 미래에 조금이라도 나은(또는 덜 나쁜) 영향을 끼칠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행여 내 표가 사표(死票)가 될까 염려할 필요도 없겠다. 내가 찍은 후보가 떨어지더라도 당선자를 지지하지 않은 유권자의 한 표, 한 표가 당선자에게 압력이 되고 견제장치가 될 수 있는 까닭이다. 세종은 1결당 10두씩의 일괄징수가 옳다고 여겼다. 투표 결과도 그랬다. 하지만 7만여 명의 반대자들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래서 14년 동안 갈고 다듬어 합리적인 제도를 만들어 냈다. 함경도 주민들이 말도 안 된다고 기권해 버렸다면 메마른 땅에서 세금을 지어 내느라 허리가 휘지 않았겠나. 500년 전 조상들이 준 교훈이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