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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柳時薰과 天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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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바둑을 처음 만든 사람은 바둑판 한가운데 점을 찍어 이를 「천원(天元)」이라 부르고 어떤 질서를 약속했다고 전한다.고수(高手)는 중앙을 차지한다는 말도 있다.바둑판의 3백61곳중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하늘 그 자체가 오묘하듯 바둑판의 「천원」자리 또한 오묘한 곳이어서 섣불리 손이 가질 않는다.그래서 보통 귀부터 두어나가는데 이따금 첫점을 슬그머니 「천원」자리에 올려놓으면 상대방을 당황케 하기 일쑤다.
그러나 일본(日本)에서 최초의 「천원국」은 시도했던 사람이 패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막부(幕府)시절의 야스이 산테쓰(安井算哲)란 사람이다.그는『바둑판의 3백61로(路)가 우주의 형상을 그린 것이라면 가장 긴요한 요소는 당연히 그 한가운데 천원이라야 한다』며 가문의 흥망이 걸린 어성기(御聖棋)에서 이를 실천에 옮기지만 패하고만 것이다.이를 가리켜 「천원의 미로(迷路)에 빠졌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일본에서 활약중인 유시훈(柳時熏)6단이 도일(渡日)8년만에 처음으로 「천원」타이틀을 획득한 것은 여러모로 상징적인 의미가있다.비록 「천원」타이틀은 상금 액수에 따른 랭킹에서 기성(棋聖).명인(名人).본인방(本因坊).십단(十段)에 이은 5위에 불과하지만 일본 바둑계의「천원」자리를 차지한 것만큼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멀지않은 장래에 일본 바둑을 석권하게 될 신호탄이라는 것이다.
조치훈(趙治勳)9단이 80년을 전후해 일본 바둑계를 완전 장악했을 때 일본의 기사(棋士)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서 「조치훈 타도」를 지상의 과제로 삼았었다.趙9단은 그네들과 외롭고 힘겨운 투쟁을 벌여야 했으며 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퇴조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 압박감 탓이었음은 엊그제 柳6단과 함께 「왕좌(王座)」타이틀을 획득,기성.본인방등 3대 타이틀의 주인공이 된 것으로 충분히 입증된다. 수읽기와 감각이 뛰어난 柳6단의 이번 쾌거는 趙9단에게도 힘을 보태줄 것이 분명하니 이제 일본바둑은「2중의 적(敵)」을 맞게된 셈이며,7대 타이틀중 4개를 이들 한국의 두 기사가 장악한 것으로 미루어 조만간 이들이 일본 바둑을 평 정(平定)할는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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