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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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강의실을 나서는데 문앞에 서있던 소라가 내 어깨를 탁 쳤다.
『잠깐만…,다른 데 갈 데 없으면 나하고 같이 갈래?』 다른아이들이 우리를 쳐다보았다.2시간짜리 문학개론 시간이 끝나고 5교시까지는 수업이 비어 있었다.문과대학 내에서는 신입생 수련회에서의 파출소 앞 시위사건 이후,소라와 나는 마치 공인받은 관계처럼 이상하게 돼있었다.어쨌든 소라는 아침부터 버스 안에서치한에게 시달리고 학교에서는 노교수의 심술에 시달린 처녀였다.
내게도 그런 소라를 위로해줄 의무쯤은 있을 거였다.매점에서 마실 걸 사들고 나와서 벤치에 앉았을 때 내가 말했다.
『아까 니가 한 말들은 거짓말이었어.』 소라가 지갑을 꺼내 음료수 값을 냈으니까.소라는 깔깔 웃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직도 모르는 거야?』 『…만우절?아무리 그렇지만 공개적으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나도 깜박 속았는 걸.아무리 연기가 전공이라지만 말이야.』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구.웃자구 시작한 건데 교수님이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니까 거둬들일 수가 없었다구.그런 거 있잖아.』 『하느님은 모든 동물들에게 하나씩 무기를 주셨대요.사자에겐 이빨을 문어에게는 먹물을,그리고 여자에게는 거짓말하는 능력을.』 『멍달수씨가한 말인가.』 『쇼펜하워야.여자를 간파한 몇 안되는 남자지.』『도스토예프스키가 뭐랬는 줄 알아.진실은 어떤 바보라도 말할 수가 있다.거짓말은 오직 지적인 자들만의 특권이다.그들은 거짓말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한다.알만 해? 의도적인 건 아니었지만,오늘 문학개론 시간에 들어온 사람들은 버스나 전철 안에서 일상적으로 저질러지고 있는 은밀한 폭력에 대해서 반공식적으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됐을 거라구.안그래?』 소라의 말을 듣고 나는묘하게도 써니와 하영이를 떠올렸다.써니와 하영이가 내 마음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생각했다.소라는 매력적인 애였지만 그렇다고 소라를 들여 앉히기 위해서 내가 나가달라고 말할 수 있는 여자애는 아직 아무 도 없었다.
『우리 윤찬이나 찾으러 갈까.당구장에 있겠지 뭐.』 괜히 윤찬이를 끼워주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수련회 이후,소라와 내가 단둘이 시간을 보낸 것보다는 윤찬이와 셋이 어울린 적이 더 많았다.가끔은 윤찬이의 새 여자친구까지 합세하기도 했다.호감을 느끼는 남자와 여자가 단둘이 있는 건 어떤 경우에도 아주위험한 짓이었다.
윤찬이의 새 여자친구로 말하자면 죽이는 애였다.
소라와 윤찬이,나 이렇게 셋이 돈암동의 호프집에 갔을 때였는데,윤찬이가 무슨 고백이라도 하듯이 말하는 거였다.괜찮은 여자애를 학교에서 발견했는데 눈에 어른거린다고.사대에 다니는데 깜찍함과 성숙함이 한몸에 다 들어있는 것 같은 여자 애라고 했다.그날 소라는 약간 긴장하는 것 같기도 했다.여왕자리가 흔들리고 있다고 느낀 것인지….
며칠 후에 윤찬이가 우리 강의실로 찾아와서 나하고 둘이 갈 데가 있다고 그랬다.윤찬이가 나를 끌고 간 곳은 사대 건물이었는데 4층에 무용 연습실이 있었다.타이즈 차림의 여자애들 몇이이리저리 빙빙 돌고 있는 게 보였다.
『잘봐봐.저기 두번째 애야.』 나는 순간 푹 웃음이 나왔다.
그애는 개갈보,아니 계희수였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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