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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과 쪽박 오가는 요즘 분양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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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형 건설사는 최근 파주신도시에서 ‘굴욕’을 당했다.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 브랜드 아파트를 내놓았지만 3순위까지 가서도 전체 물량의 20% 이상을 미분양으로 남겨야 했다. 하지만 지난주 인천 송도지구에서의 분위기는 딴판이었다. 똑같은 이름의 아파트가 최고 100 대 1이 넘는 경쟁률을 기록하며 전 평형에서 1순위 마감됐다. 회사 관계자는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요즘 시장을 종잡기 어렵다”고 말했다.

분양시장이 난리다. 신도시 사상 처음으로 파주가 대규모 미분양을 기록하고, 전국적으로는 10만 채를 넘어섰다. 서울 강남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미분양 뒤 선착순 분양을 하는데도 상당수 집이 비어 있는 아파트 단지가 도곡ㆍ서초동 등지에서 나타났다. 그렇다고 시장이 침체 일변도인 것은 아니다. 송도ㆍ청라신도시엔 청약자가 몰리고, ‘파리도 안 날아온다는’ 지방에서 100% 청약을 기록한 단지도 있다.

가격ㆍ입지따라 ‘좋은 집’만 팔려

해석은 엇갈린다. ‘단기 충격’이라는 시각과 ‘수요자 시장으로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시각이다. 단기 충격으로 보는 쪽은 ‘분양가상한제를 피하느라 건설업체가 한꺼번에 분양에 나서면서 일시적인 공급 초과 상태가 된 것뿐’이라며 ‘내년 상반기에 미분양 물량이 해소되고 새 정부가 규제를 조금 풀어주면 시장이 살아날 것’으로 기대한다. 인기 지역의 청약 열기가 여전하다는 점이 근거다. 하지만 정반대의 시각도 많다. 공급 과잉이 생각보다 오래 가면서 분양시장도 가격과 입지에 따라 성패가 좌우되는 수요자 중심 시장으로 바뀔 것이라는 지적이다. 현재로선 후자가 우세하다.

◇파주와 송도 사이=이달 초 대규모 미분양을 기록한 파주신도시는 지난주 간신히 체면치레를 했다. 청약통장이 없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4순위 청약을 받은 일부 단지가 높게는 수십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분양 쇼크가 가라앉은 것은 아니다. 당첨자 발표가 나기 전 4순위 청약을 허용하는 편법이 동원됐고, 저층에 당첨된 사람이 다시 청약하는 사례도 빈발했다. 업계에선 입지나 층이 좋지 않은 당첨자들이 대거 계약을 포기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파주신도시의 실패는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우선 은평뉴타운과 송도ㆍ청라신도시가 분양되기 직전이어서 청약통장 보유자 사이에 기다려 보자는 심리가 강했다. 고양시와 건설업체 간 분양가 줄다리기가 끝나는 대로 분양이 시작될 식사ㆍ덕이지구도 가까이 있다. 시장의 관심을 독차지했던 과거 신도시와 달리 만만찮은 경쟁자들이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보다는 가격이 결정적이었다고 보는 의견이 대다수다.

박상준 리얼티랩 소장은 “파주신도시에 상한제가 적용됐다지만 주변 실거래가가 아닌 호가를 기준으로 책정돼 분양가가 근처 단지와 비슷했고, 실거래되는 가격보다는 오히려 높았다”며 “시장이 하락하는 상황에서 수요자들이 투자 가치를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남양주 진접지구와 양주 고읍지구, 김포 풍무지구 등 최근 미분양된 택지개발지구도 이런 경우다.

주변보다 30%까지 싼 송도는 인기

송도신도시의 성공도 가격으로 설명된다. 바다를 매립해 조성된 송도는 땅값이 싸 건설업체들이 상대적으로 낮은 분양가를 책정할 수 있었다. 대개 주변 단지보다 3.3㎡당 200만∼300만원이 낮았다. 최고 30% 이상 싼 대형 건설사의 단지가 분양을 앞두고 있을 정도다. 박원갑 스피드뱅크 연구소장은 “불확실한 시장에선 수요자들이 워런 버핏의 스승인 벤저민 그레이엄이 말한 ‘안전 마진 투자’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안전 마진 투자는 ‘어떤 경우에도 수익을 낼 수 있는 투자’를 말한다. 앞으로 오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대신 분양가가 근처 단지보다 현저히 낮아 투자 수익이 보장되는 곳에만 수요가 몰린다는 것이다. 박 소장은 “단순히 분양가가 높고 낮은 게 문제가 아니라 실질 가치를 반영하고 있느냐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건설사들은 2003년 이후 입지와 수급을 고려하지 않고 큰 폭으로 분양가를 올려왔다.

◇당분간은 수요자 시장=공급 초과는 당분간 불가피하다. 상한제 회피 물량을 소화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스피드뱅크에 따르면 11월부터 지난 14일까지 한 달 보름간 전국에서 분양됐거나 진행 중인 아파트가 7만 가구에 가깝다. 올 한 해 전체 분양분의 40%다. 예년 같은 기간보다 절반이나 많고, 지난해보다는 두 배로 늘어난 물량이다. 금리가 치솟고 있는 데다 연말연초 대기물량이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 심각하다.

대선 이후 규제 완화 가능성이 거론되지만, 건설사들이 여전히 주변 시세보다 높은 ‘배짱 분양’을 하고 있는 점이 걸림돌이다. 시장이 비싸다고 느끼는 데는 정부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게다가 2010년까지 잇따라 조성되는 신도시가 분양가상한제로 공급된다. 수요자들은 더욱 느긋해질 것이다. 내년에만 수원 광교 등 서너 개가 기다리고 있다.

공급자에서 수요자 위주로 시장 재편

일부에선 이 같은 상황이 일본식 장기 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일본은 주택보급률이 105%에 이른 1980년대 말 투기가 기승을 부리다 거품이 꺼지며 된서리를 맞았다. 고령화로 수요 자체가 감소한 때문이다. 한국도 주택 수를 가구 수로 나눠 계산한 주택보급률이 지난해 107%로 선진국과 비슷해졌다. 하지만 이를 반박하는 지표도 있다. 수도권의 보급률은 아직 100%에 미치지 못한다. 서울은 90%를 막 넘어섰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가 주택보급률보다 더 현실을 반영한다고 여기는 지표인 인구 1000명당 주택 수는 아직 선진국보다 한참 적다. 고준석 신한은행 재테크 팀장은 “2인 이하 가구 증가, 수도권 인구 유입 등이 지속되면 급락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수요 위축과 금리, 규제 등의 하락 요인과 강남 재건축을 중심으로 한 상승 기대감이 상당 기간 팽팽하게 맞설 것”이라고 내다봤다.

나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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