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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Review] ‘용기·관용 리더십’이 세상 구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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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달력 개정은 카이사르가 남긴 대표적인 실용적 업적이다. 기존 로마 달력은 1년이 355일이었다. 달력 상의 계절과 실제 계절을 맞추기 위해 윤달을 끼워 넣어야 했는데, 이는 사제단의 재량에 따라 결정됐다. 1년이 445일에 달하는 해(기원전 46년)가 있을 정도로 무척 혼란스러웠고,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도 있었다. 카이사르는 1년을 365일로 정한 ‘율리우스력’을 내놓았다. 오늘날의 달력도 이 율리우스력을 근간으로 하고 있으니, 2000여 년 전 세상에 나온 그의 발명품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지 짐작할 수 있다.

 지도자에게 만사(萬事)라는 인사(人事)문제에서도 카이사르는 ‘개개인의 능력’이라는 합리적 기준을 갖고 있었다. 후견 관계로 얽힌 로마 사회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갈리아 전쟁 기간 동안 승진하거나 상을 받은 백인대장들은 언제나 눈에 띄는 용기를 보여준 사람들이었다. 훗날 그의 전기를 쓴 수에토니우스도 “카이사르는 부하들의 생활 태도 또는 재산 여부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로지 그에게 용기가 있는가에만 관심을 가졌다”고 기록했다.

 카이사르의 특징으로 꼽히는 ‘관용’에도 실용적인 요소가 많았다. 패배한 적을 로마의 법을 준수하고 세금을 납부하는 새로운 속주민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관용은 필요했던 것이다. 정적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었다. 기원전 49년 폼페이우스에 맞서 루비콘강을 건넜던 카이사르. 코르피니움을 함락시킨 뒤에도 약탈과 파괴 행위는 일절 하지 않았다. 항복한 에노발부스와 폼페이우스 측 원로원 의원들을 모두 풀어줬고, 심지어 에노발부스가 가져온 돈도 받지 않았다. 평판을 계산한 행동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상대가 죽기 살기로 싸우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 속내는 카이사르 스스로도 분명히 밝힌 바다. “잔인한 행동은 필연적으로 증오를 낳으며 승리를 유지할 수 없게 한다는 사실을 이미 여러 사람이 보여 주었다. 우리는 자비와 관용을 통해 강해질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방식의 정복이다.”

 한편 처칠의 리더십에서는 투쟁적 기질이 큰 기여를 했다. 처칠은 항복을 하느니 무슨 짓이라도 하고 어떤 고통이라도 받을 사람이었다. 영국이 홀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처칠은 ‘지금이야말로 살아도 괜찮고 죽어도 괜찮은 때다’라는 글을 썼다. 1940년. 프랑스를 비롯해 수많은 유럽 국가들이 나치 앞에 쓰러지고, 소련이나 미국은 아직 움직이기 전이었다. 처칠은 그의 상징인 V사인, 여송연과 함께 전 세계를 구출해 낸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다. 어찌 보면 처칠의 리더십이 빛을 발한 건 시의성에 맞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영국 국민들이 더 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았을 때 처칠은 내쳐졌다. 1945년 독일의 항복을 받아낸 직후 총리직에서 해임된 것이다.

 뛰어난 커뮤니케니션 능력은 카이사르와 처칠의 공통점이다. 설득력 있는 화법으로 자신의 비전을 대중들과 나누고 용기를 북돋웠다. 유머감각도 남달랐다. 아프리카 원정 당시 카이사르의 군대가 압박을 당하고 있을 때였다. 군단병들 사이에 두려움이 퍼졌다. 그 와중에 기수 한 명이 도망치려 했다. 그를 붙잡아 돌려세운 카이사르는 “이봐, 적은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야”라고 말했다. 처칠은 1944년 의회에서 제1차 세계대전 때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때의 실수는 다시 저지르지 않을 것이 확실합니다. 다른 실수를 저질러야 하니까요.”

 부하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단어 하나까지 신중하게 골라 썼다는 점에서도 두 사람은 꼭 닮았다. 카이사르는 병사들을 부를 때 “여러분”이나 “병사들” 대신 늘 “전우들(commilitones)”이라고 했으며, 처칠은 “‘하급(low-grade)보병여단’이란 표현을 쓰지 말고 ‘예비여단’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 모두 빼어난 문장가이기도 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는 라틴어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고 있으며, 처칠은 『제2차대전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까지 탔다. 남들의 역사적 평가에 앞서 스스로 자신의 업적을 작품으로 꾸며 내놓았으니, 카이사르와 처칠은 동시대 어떤 인물보다 후한 평가를 받기 유리한 고지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동맹국 비티니아의 늙은 왕 니코메데스와 동성애 스캔들을 일으킨 카이사르와 더 우세한 쪽을 찾아 보수당에서 자유당으로, 또 자유당에서 보수당으로 당적을 바꾼 ‘기회주의자’ 처칠 등 이들의 약점은 논란거리에 머물고 있다.

 영웅이 없는 시대, 이렇게 곱씹고 곱씹어도 감탄할 만한 인물로 남았다는 게 후세로서는 일면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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