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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글로벌 금융시장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9호 21면

워런 버핏 [블룸버그 뉴스]

‘가치투자의 귀재’인 워런 버핏(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사진)이 지난주 정크본드 21억7500만 달러(약 2조원)어치를 사들였다. 미국 에너지 기업인 텍사스유틸리티스(TXU)가 발행한 물건이다.

‘고수익 포식자’ 하이에나들 어슬렁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이는 미국 양대 사모펀드인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와 텍사스퍼시픽그룹(TPG)이 내놓은 채권이다. 이들이 450억 달러를 들여 TXU를 포획해놓고 인수대금을 마련하기 위해 내놓은 차입매수(LBO)용 회사채다. 아직 자기 것이 안 된 회사의 이름으로 회사채를 발행했기에 ‘속도위반 채권’이다.

차입매수 채권은 1980년대 후반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가 미 경제가 침체에 빠진 91~92년 휴지조각으로 전락한 적이 있다. 이른바 ‘정크본드 파동’이다.

요즘 분위기도 심상찮다. 사모펀드들이 내놓은 차입매수 채권 가격이 급락하고 있다. 지난 6월을 100으로 봤을 때 11월 말 가격은 86 수준이다. 14%나 하락한 셈이다. 미 경제가 내년에 침체에 빠지면 실적이 줄어 피인수 기업이 채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 가능성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 법한 버핏이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미 경제가 침체 조짐을 보이고 있는 요즘 정크본드를 사들이자 글로벌 금융시장의 투자 고수들은 화들짝 놀랐다.

버핏은 미 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지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것일까. 지난해 8월 이후 그는 집값 거품의 후유증을 누누이 경고해왔다. 그래서 그가 서브프라임 사태와 경기 침체 이후를 내다보고 있기 때문에 TXU 정크본드를 사들였을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짧게는 2~3년, 길게는 5~6년 앞을 내다보는 게임을 시작한 셈이다.
 
다시 늘어나는 금융 하이에나

금융시장에선 버핏처럼 위기 또는 침체 국면에 금융자산 등을 헐값에 거둬들였다가 나중에 비싸게 파는 투자자를 하이에나로 부른다. 궁지에 몰린 다른 짐승의 먹잇감을 낚아채는 하이에나의 습성에서 따온 말이다.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에는 하이에나가 빈번하게 출몰하고 있다. 서브프라임 사태로 궁지에 몰린 사자나 호랑이들(대형 금융회사)이 포획했던 먹잇감(부실자산)을 포기하며 뒷걸음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에나들 중에는 버핏처럼 보수적인 투자자에서 돌변한 사례가 있고 처음부터 그런 행태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아프리카의 하이에나가 높은 사냥 성공률을 자랑하듯이 그들도 고수익을 자랑한다. 이미 포만감을 만끽하고 있는 하이에나도 있다.

미국의 헤지펀드 매니저인 앤드루 라데는 서브프라임 관련 자산에 베팅해 올해에만 벌써 1000% 수익을 올렸다고 밝혔다. 어떤 비법을 활용했을까. 미국과 유럽 금융시장에는 이른바 자산담보부증권 지수(ABX)라는 게 있다. 금융회사들이 보유한 각종 자산을 유동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증권인 ABS의 가격들을 주가지수처럼 만들어 발표하는 것이다. 집값 거품을 타고 이 지수에 서브프라임 가격이 대거 스며들었다.

라데는 지난해 8월 이후 미 주택시장이 주춤거리자 올해에는 반드시 침체가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하기 위해 ABX지수를 공매도(Short)하는 전략을 치밀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지수가 팔기로 약속한 금액 이하로 떨어지면 막대한 수익을 챙긴다. 반대로 지수가 그 금액보다 올라가면 쪽박을 찬다.

그의 예측대로 지난 2월 서브프라임 사태가 불거졌다. 바로 작전의 실행에 들어갔다. 그는 미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하 등으로 ABX지수가 반등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종일관 공매도했다. 그 결과는 대박이었다. 라데는 “미 경제가 내년에 반드시 침체에 빠지고 주요 은행들이 파산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일부는 지난해부터 활동 시작

버핏이나 라데보다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하이에나들도 있다. 홍콩 헤지펀드인 AMD캐피털은 지난해 7월 부실자산 전문 사냥꾼인 마크 베이커를 영입해 작업에 들어갔다.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에는 또 다른 사냥꾼인 기 모어라가 포진하고 있다. 이들은 1994년 멕시코 사태와 97년 아시아 금융위기, 98년 롱텀캐피털 사태 직후 금융회사들이 쏟아낸 부실채권을 거저 사다시피 한 뒤 나중에 비싼 값에 되팔아 평균 4.5배 이상 수익을 냈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많은 베이커와 모어라가 개인 파산이 급증한 유럽에서 활동하다 7월께부터 미국으로 대거 이동했다고 지난주 보도했다. 씨티그룹과 메릴린치, 베어스턴스, ABN암로 등 글로벌 금융회사들이 손실처리하면서 털어내고 있는 서브프라임 관련 부실자산을 사냥하기 위해서다. 조만간 이들의 무용담이 세상에 알려질 것으로 보인다.

미 CNBC의 재테크 프로그램 ‘매드 머니’(미친 돈)를 진행하는 제임스 크래머는 “금융 하이에나는 야비한 존재들이 아니다”며 “자금·배짱·비전 등 투자의 3박자를 고루 갖춘 사람들”이라고 추켜세웠다.

전설적인 하이에나인 존 템플턴(95·작은 사진)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글로벌 분산투자 펀드를 개발해 운용했고 은퇴 이후에는 박애주의자로 명성을 쌓고 있다.

그는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뉴욕 증시가 패닉에 빠진 39년 1만 달러로 주가가 1달러를 넘지 않은 종목 104개를 거둬들였다. 이 중 34개 종목이 파산으로 휴지조각이 됐다. 하지만 나머지 종목이 급등해 4년 뒤인 43년 4배 수익을 올렸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가장 비관적일 때 투자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금융
현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이 원칙과 하이에나의 본능을 잊지 않았는지, 지난 97년 위환위기로 한국 증시가 폭락하자 4000만 달러를 투자해 나중에 몇 갑절을 벌어갔다.

세계적 컨설팅회사인 맥킨지의 도미니크 버튼 아시아·태평양 회장은 “기업이 금융시장 하이에나를 벤치마킹하면 명운이 180도 바뀔 수 있다”고 줄곧 강조해왔다. 위기 또는 침체 국면을 거치면서 경영환경이 급변하는데, 기업이 이를 잘 활용하면 가치 있는 기업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림).

버튼이 예로 제시한 곳이 바로 국내 두산그룹과 미 2위 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다. 두산은 IMF 외환위기를, BOA는 80년대 대부조합(S&L) 사태를 활용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개인투자자들에게도 기회는 찾아온다. 요즘 글로벌 금융경색의 후폭풍으로 국내 채권시장도 흔들리고 있다. 채권금리가 연일 뛰고 있다. 금리 선물 등을 놓고 베팅하는 투자자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위기는 기회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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