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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국내 기업들 해외 M&A 바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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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 18면

신인섭 기자

인수합병(M&A) 시장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임석정 JP모건 한국대표의 역할은 지난해부터 아주 달라졌다. ‘국내기업 세일’에서 ‘해외기업 구매’로 입장이 바뀐 것이다. 1995년 한국에 부임한 그는 외환위기 전후 10년 가까이 국내기업을 사들이려는 외국회사를 대행하는 입장이었다. 제일은행·에쓰오일 등이 외국계 회사가 되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최근엔 국내 대기업의 의뢰를 받아 살 만한 외국기업을 알아보는 일로 바쁘다. 재무·회계 정보와 시장점유율 등 기본사항은 물론 시장에서의 평판, 직원들의 사기 등 수치로 나타내기 힘든 부분까지 자세히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건당 3억 달러 이상인 딜을 서너 건 의뢰받고 있는데 내년께면 가시화될 것 같다”고 말했다.

어제의 ‘먹잇감’이 오늘은 ‘사냥꾼’

국내기업의 해외 M&A가 붐이다. 두산·한화 등이 최근 굵직한 거래를 성사시킨 데 이어 삼성·LG 등 선두 기업들도 그간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해외기업 인수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진로-하이트·삼양사 등 중견기업의 관심도 크다. 90년대 초·중반에 이어 두 번째인 해외 M&A 붐은 국내기업의 실력 향상과 내수시장 성장 정체, 원화 강세 등이 복합적으로 어울려 빚어지는 현상이다.

규모 커지고 속도 빨라져

외국계 컨설팅회사에 근무하던 K씨는 2년 전 국내 한 대기업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해외 M&A 담당 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예닐곱 명의 팀원을 데리고 인수할 만한 외국업체를 물색하고 협상을 진행시키는 게 그의 업무다. 한 달에 20일 이상을 해외에서 지내는 그의 행선지를 아는 사람은 사내에서도 얼마 안 된다. 경쟁회사의 ‘선수들’에게 알려지면 인수 대상 업체가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현지에서 대상업체의 물건과 서비스를 구매해 품질을 파악한다. 할인점에서 유통망을 점검하는 한편 잠재적인 공동 매수자와 컨소시엄 구성 협상을 벌이는 활동도 한다. 그는 “국내기업들이 해외기업에 관심을 가지게 된 2∼3년 전부터 나 같은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며 “본사와 별도의 사무실을 차리고 10여 명이 팀을 이뤄 뛰는 곳도 있다”고 전했다.

국내기업의 해외기업 인수는 지난해부터 본격화됐다. 기업들이 외환위기의 그늘에서 벗어나 한숨을 돌리게 된 시점이다. 두산그룹은 2005년 수(水)처리 전문회사인 미국의 AES사를, 2006년에는 루마니아 크베너(철강 주단조)와 영국 미쓰이밥콕(보일러)을 각각 사들였다. 올 들어서도 중국 연화유대기계(휠로더)와 미국 CTI(엔진), 미국 잉거솔랜드사의 소형 중장비 3개 부문 인수를 잇따라 성사시켰다. 효성은 지난해 중국 남통우방변압기(3월), 독일 아그파포토 자산(4월), 굿이어의 해외자산(9월) 등을 잇따라 인수했고, 올 1월에는 동국무역의 중국 스판덱스 공장을 사들였다. 동양제철화학은 지난 4월 미국 나스닥 상장사인 에버그린솔라의 주인이 됐고, 한화는 지난달 20일 미국의 자동차 부품소재 회사인 아즈델 지분 100%를 확보했다. 삼성도 이스라엘의 반도체 설계회사를 인수하며 13년 만에 해외 M&A를 재개했다. 도료 전문 중소기업인 SSCP는 최근 자사의 한 해 매출액에 버금가는 금액인 910억원을 들여 독일의 특수코팅재 업체인 슈람사를 인수했다.

왜 해외인가

지난해 9월 한화는 아즈델의 대주주인 조인트벤처 두 곳으로부터 인수의사를 타진받았다. ‘투자시한이 끝나가 지분을 정리해야 하는데 기왕이면 동종업계에서 노하우를 갖고 있는 한화가 인수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내용이었다. 한화는 일 년이 넘는 검토 끝에 친환경 소재 기술력을 얻을 수 있고 세계 시장 진출의 교두보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인수를 결정했다. 한화 관계자는 “예전 같으면 매도자가 한국기업엔 귀띔도 해주지 않았을 것”이라며 “한국기업의 현금 동원력과 기술력, 브랜드 파워가 M&A 시장에서 서서히 인정받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한상의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매출액 1000대 기업의 사내유보율(자본금 대비 잉여금)은 지난해 616%를 기록했다. 2002년(232%)의 세 배 가까운 수치다. 덩치 큰 해외기업을 사들일 정도로 주머니가 든든해졌다는 얘기다. 원화 강세는 해외에서 이 돈의 위력을 배가시켰다. 1억 달러짜리 기업을 사들일 경우 3년 전만 해도 1300억원이 들었지만 지금은 950억원이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촉발된 신용경색은 주요 ‘사냥감’인 미국 기업들의 값을 크게 낮추는 역할을 했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00년대 초반 정보기술(IT) 호황기에 39.5%를 기록했던 M&A 프리미엄이 최근 26%로 크게 낮아졌다.

국내기업에도 해외 M&A는 반가운 기회다. 내수시장의 성장성이 한계에 부닥치고 국내 M&A 대상 기업이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직후 연 14%에 달했던 기업의 매출액 증가율은 최근 5% 미만으로 떨어졌다. 국내 소비증가율은 몇 년째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밑돌고 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자니 위험부담이 크고,국내에서 인수할 만한 기업은 몇 개 되지 않는다.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M&A 대상은 대우조선해양과 대우인터내셔널 등 예닐곱 개뿐이다. 이병남 보스턴컨설팅 한국지사장은 “내수시장이 포화인 상태에서 기업을 키우려면 해외 M&A가 지름길”이라며 “안팎의 여건이 우호적인 지금이 적극적으로 나설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실패의 기억

해외기업 인수 열풍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 90년대 초·중반 대기업들이 앞다퉈 외국회사를 사들였다가 큰 손실을 보고 물러선 경험이 선명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국내 최대기업인 삼성전자부터 그렇다. 94년 미국의 PC메이커인 AST리서치를 인수할 때만 해도 삼성전자는 장밋빛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세계 6위였던 AST리서치를 통해 자사의 PC를 세계시장에 파는 방식으로 취약했던 브랜드 파워와 세계시장 유통망을 일거에 손에 쥘 생각이었다. 경영권 확보에만 거금 5억4700만 달러를 들였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인력 감축을 둘러싼 노조와의 갈등, 한국식 대량생산 방식을 고집한 데 따른 불량률 증가로 적자가 쌓여만 갔다. 결국 이 회사는 97년 완전 자본 잠식돼 다음해 미국 증권거래소에서 퇴출됐고, 삼성 측은 99년 경영권을 포기했다. 증권업계는 직·간접 손실액을 15억 달러로 추정하며 “현지 문화와 관습을 무시하고 한국식 경영을 밀어붙인 결과”라고 평가하고 있다.

현대전자(현 하이닉스)가 같은 해 인수했던 미국의 하드디스크 드라이브 제조사 맥스터 인수도 실패로 끝났다. 이 회사는 삼성전자가 인수를 검토했다가 막판에 포기한 회사였다. 현대전자에 인수 배경을 묻자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을 자랑하는 삼성이 인수를 검토한 회사였으니 당연히 가치가 있는 것 아니었겠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시의 글로벌 M&A가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졌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인수 첫해부터 적자에 시달린 현대는 2001년 이 회사를 처분하고 만다.

그나마 LG전자가 인수한 제니스가 뒤늦게 빛을 보는 형편이다. LG전자는 91년부터 이 회사 지분을 사들이기 시작해 99년에 완전 인수했다. 그것도 법원에 정리계획(법정관리)을 제출하는 ‘치욕’을 감수하고서였다. 당시만 해도 미국의 대표적인 TV 브랜드가 한국의 전자업체한테 팔렸다면서 자존심 상해 했지만, 사실 제니스는 엄청난 부실회사였다. LCD 중심으로 재편되는 시장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브라운관을 고집한 탓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사정이 많이 좋아졌다. 10년여에 걸친 구조조정 끝에 제니스는 직원 수십 명의 미니 회사가 됐다. 디지털 방송기술 특허 덕분에 연간 로열티 수입이 5000만 달러에 이른다. 애물단지가 보물단지가 된 셈이지만 회사를 살리기 위해 LG가 쏟아 부은 5억 달러를 회수하려면 아직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중앙대 박찬희(경영학) 교수는 “대기업들이 뚜렷한 목표도 없이 ‘영토 전쟁’ 차원에서 몸집 불리기에 나섰던 90년대와 최근의 M&A는 분명히 다르다”면서도 “아직 ‘글로벌 경영’이라는 막연한 목표만으로 해외로 나서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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