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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詩 '향수' 중 "해설피 뜻은 해 질 무렵" 주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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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테너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이 불러 인기를 모았던 노래 '향수'는 이렇게 시작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익히 알려졌듯 시인 정지용(1902~?)이 1927년 문학 잡지 '조선지광'에 발표했던 시를 노랫가락에 옮겼다. 가사만 읽어봐도 시골 고향의 평화로운 정경이 눈에 잡힐 듯하다.

퀴즈. 얼룩백이 황소는 어떤 소? 얼핏 얼룩 무늬 젖소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건 오해다. '칡소'와 같이 거무스레한 짙은 갈색의 무늬를 지닌 황소를 가리킨다.

이건 연습 문제다. 국문학자들은 그간 '해설피'의 의미를 놓고 씨름해왔다. 예컨대 문학평론가 김재홍 교수는 '한국현대시시어사전'에서 '해가 질 무렵'으로 풀이했고, 유종호 교수도 같은 의미로 시를 해설했다. 하지만 학계에선 '구슬프게''별뜻없이' 등의 부사로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서울대 권영민(국문학) 교수는 전자의 손을 들어준다. 그리고 최근 발간된 '정지용 시:126편 다시 읽기'(민음사 발간)에서 근거를 밝혔다. '해설피'는 '해+설핏하다'에서 변형된 말이라는 것. 실제로 충청도 일대에선 저녁 무렵 외출할 때 "해설피 어디 나가느냐"는 말을 쓰고 있다. 참고로 정지용의 고향은 충북 옥천이다. '설핏하다'는 '해가 져 밝은 빛이 약하다'는 뜻이다.

또 '향수'의 마지막 연은 "하늘에는 성긴 별/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로 시작한다. 여기선 '성긴'의 기본형은 '공간적으로 사이가 뜨다'는 뜻의 '성기다'다. 그런데 시인은 시를 처음 발표할 때 '석근'으로, 또 '지용시선'(46년)에선 '성근'으로 표기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선 '성근'이 '섞다'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했으나, 저자는 '석근'은 '성긴'의 오식이라고 주장한다.

권교수는 이처럼 정지용이 남긴 시 1백26편을 다시금 정리했다. 그는 87년 '정지용 전집' 발간 이후 '원본 정지용 시집'(이숭원), '정지용 사전'(최동호) 등의 주석서에서도 잘못 읽은 대목 34군데를 바로잡았다고 주장했다. 잡지 게재 당시의 원문, 시집에 묶였을 때의 모습, 현대 표기법에 맞게 고친 것 세 개를 비교하도록 구성했다. 소위 정지용 시의 '정본화(正本化)'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일례로 "말아, 다락 같은 말아/너는 즘잔도 하다 마는/너는 웨그리 슬퍼 뵈니?"('말')에서 '다락 같은'을 보자. 이를 두고 부엌 위에 물건을 올려놓은 다락이나 (이숭원 교수), 매우 높고 키가 크다는 의미로(최동호 교수) 풀이됐으나 저자는 '덩치가 헌거롭게 크다'는 뜻의 형용사 '다락같다'가 옳다고 말한다. 또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도로 피여 붉고"('인동차')의 '덩그럭 불'은 '다 타지 않은 장작불'을 뜻하는 '잉걸 불''잉그럭 불'과 같다고 설명한다. 예전에는 '덩그렇게 떨어져 피어 있는 불''불이 피어오르는 모양' 등으로 해석했다.

권교수와 시인의 인연도 흥미롭다. 저자는 30여년 전 청계천 헌책방에서 정지용의 시집 '백록담'(41년) 초판본을 어렵게 구하고, 지난 수년간 각 시의 개작 과정을 꼼꼼히 살폈다. 월북 문인이란 '딱지' 때문에 이름을 꺼내기도 어려웠던 정시인이 80년대 후반 해금되자 그는 "우리 언어의 빛나는 연금술을 다시 찾은 것과 다를 바 없다"며 감격하기도 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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