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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규 칼럼] 노무현 - 이헌재의 궁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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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79년 10.26사태가 터지기 2개월전 쯤, 대통령 박정희는 전 재무장관 김용환을 은밀히 청와대로 불렀다. "이봐 임자, 경제가 제대로 되는 게 없어. 어찌해야 하는지 서둘러 보고서를 만들어 와."

당시 정부는 수출 일변도를 벗어나 신현확 경제부총리를 중심으로 강력한 긴축정책을 펼 때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과거의 정책이 잘못됐다며 사사건건 뒤집어 엎는 신현확이 영 마음에 안들었다. 정책을 바꾸라고 대통령 자신이 사람을 교체했으면서도 막상 그가 바꿔나가니까 못마땅하고 불안했던 것이다. 신현확의 기존 정책에 대한 비판이나 수정은 다시 말해 박정희 자신이 해온 것에 대한 비판이나 수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요샛말로 신현확은 박정희와 코드가 안 맞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박정희는 신현확을 내치고 역시 자신과 코드가 맞는 김용환을 다시 불러들일 요량이었다. 만약 10.26이 없었다면 실제로 그해 연말에 김용환을 재등용할 참이었다.

*** 25년 전 박정희- 신현확 관계 연상

과연 노무현-이헌재 궁합은 어떨까. 이헌재 신임 경제부총리는 어찌보면 25년 전, 신현확 부총리의 처지와 비슷한 점이 없지 않다. 신현확이 겪었던 것과 유사한 고충을 이헌재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李부총리의 성향이나 처하고 있는 경제상황으로 봐서 대통령 코드와 엇나가는 짓도 가끔 할텐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나. 대통령으로서도 지금은 이헌재가 최적임이라 하여 경제사령탑에 앉혔으나 싫은 소릴 자꾸 하며 자신을 가르치려 들면 언제 목을 뗄지 모를 일이다.

신현확은 1년도 못돼 경질될 뻔했다가 대통령이 변을 당하는 바람에 오히려 소신껏 밀어붙일 수 있었다. 긴축의 고삐를 더 강하게 조이고 훗날의 물가안정 기틀을 다질 수 있었던 것도 朴대통령이 살아 있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盧대통령과 李부총리의 궁합은 초미의 관심사다. 관록으로나 성향으로나 이헌재는 전임 김진표와는 여러 모로 다르다. 브랜드 파워도 한층 세고, 중량도 헤비급이다. 취임 첫날부터 의도된 발언으로 자신의 소신을 연출해 냈다. 분배보다는 성장이 급하다고 단언하는가 하면, 50만원 이상 접대비 처리 시비를 일으킨 국세청장을 "쓸데없는 소리"라며 면박을 줬다. 콧대높은 외국인들을 겨냥해서는 "시장이 어린이 놀이터인 줄 아느냐"며 공갈성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누구든 정부 정책에 협조 않으면 재미없다는 위협이기도 하다. 대통령과 단 둘이서 무슨 언약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소신대로 하다가 수틀리면 그만둔다는 배짱도 내비친다.

盧대통령으로서도 그를 선택하기까지 고민 많았을 것이다. 아마추어들이 판치는 친노(親勞) 정권이라고까지 직격탄을 날렸던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1년 전 경제장관들을 임명할 땐 이런 상황이 전개되리라고는 꿈도 안꿨을 게다. 마음에 드는 참신개혁형 인물들을 포진시켜 본때를 보이려 했는데 오히려 그들을 무더기 내치고, 배척했던 왕년의 베테랑들을 다시 불러들인 셈이 됐다.

*** 청와대 토론시간 확 줄여야

어쨌거나 경제가 우왕좌왕 혼란스러울 땐 리더십이 강한 스타가 필요하다. 대통령이 스타가 되려던 시도는 이미 실패로 끝났다. 경제부총리가 그 대타인데 대통령 하기에 달렸다. 전두환 대통령이 당시 김재익 경제수석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말했듯이 盧대통령도 李부총리를 띄워줄 필요가 있다. 국무회의 때도 경제부총리에 대한 권한이양을 거듭 강조하며 각별한 신뢰를 내보여야 한다. 혹시 다른 장관과 경제부총리가 대립하거나 다투면, 대통령은 즉각 부총리 편을 들어줘야 한다. 그래야 경제총수의 영이 선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청와대 토론시간을 확 줄이고, 웬만한 회의는 몽땅 경제부총리한테 넘기는 게 좋다. 걸핏하면 공론화 절차다, 라운드 테이블이다 하며 대통령이 나서서 말싸움만 붙일 게 아니라, 회의 결과만 부총리한테 보고받으면 충분하다. 그렇지 않고 또다시 대통령이 법인세가 어떻고 공권력 투입이 어떻고 하며 미주알 고주알 나서면 말짱 헛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또 벌어진다면 李부총리는 더 이상 스타일 구기지 말고 즉각 사표를 쓰시길. 노무현-이헌재 두 분이 정말 찰떡궁합이길 빈다.

이장규 경제전문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