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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 중국 최고의 경극 배우 장후오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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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장궈룽(張國榮)이 죽었을 땐 며칠간 가슴이 아팠어요. 영화배우인데도 '패왕별희'에서 보여준 그의 경극(京劇) 연기는 무척 빼어났죠."

13일 홍콩에서 만난 '중국 최고의 정파 경극 배우' 장훠딩(張火丁.33)의 첫마디였다. 경극은 중국의 대표적인 전통 연극이며, 정파(程派)는 경극의 4대 분파 중 하나로 하층 계급의 애환을 주 소재로 다루는 분야다.

"장궈룽은 죽기 직전에 베이징(北京)으로 '백사전(白蛇傳)'이란 경극을 보러 오기로 예정돼 있었지요. 사고만 없었더라면 그와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을텐데요…."

2004 홍콩 예술축제에 참가해 주룽(九龍)반도 남쪽의 공연장에서 장훠딩은 뱃길로 고작 5분 거리인 항구 저편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을 건너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호텔은 장궈룽이 투신 자살한 곳이다.

요즘 경극에선 '패왕별희'의 장궈룽 같은 여장 남자가 거의 없다. '여자가 어떻게 얼굴을 드러내놓고 집 밖에서 일을 하느냐'는 봉건적 사고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면서 경극에도 스타급 여배우가 등장했다. '우미인' '양귀비' 같은 여주연공을 진짜 여자가 맡으면서 나타난 변화다. 젊은 나이에도 장훠딩이 대가(大家)로 클 수 있었던 배경이다.

그가 경극을 시작한 것은 열다섯 살 때였다. 경극학원에 다니던 오빠의 연기를 보다가 경극에 푹 빠져버렸다. 그러나 길은 험난했다. 기본기를 익히는 데만 5년이 걸렸다. 노래와 춤.대사에 연기까지 갖추어야 했다. 게다가 삶과 예술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없으면 결코 배역과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 경극이었다.

장훠딩의 목청은 관객의 혼을 빼앗을 만큼 맑고 처량하다. 비극일수록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그가 정파의 최고봉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양귀비'처럼 황실이나 귀족층의 부귀영화를 소재로 한 작품을 올리는 매파(梅派)와 달리 정파 경극에는 슬픈 사연이 많이 깃들여 있다. 14일 밤 그의 베이징어 억양을 낯설어 하던 홍콩 관객도 그의 이어지는 절창에 끝내 기립박수를 보냈다.

"비극에선 노래.춤.대사.연기의 네가지 요소를 모두 최고조로 끌어올려야 해요.엄청난 공력이 소모되죠.공연이 끝나면 온몸의 기가 다 빠질 정도니까요.그래서 좋아요."

그래도 경극을 찾는 젊은이들은 갈수록 줄어든다. '양식을 바꾸어야 하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다. 논어.맹자에나 나오는 고어(古語)를 그대로 대사로 쓰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그의 철학은 분명했다. "변화가 무엇인지를 따져 봐야죠." 무작정 사람들의 입맛을 좇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고도 했다. "2백년 전통이 녹아든 경극을 아주 정확하게 재현하고, 아주 빼어나게 무대에 올리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변화가 아닐까요."

'다시 태어나도 경극 배우가 되겠느냐'고 묻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답했다.

"국가 1급 배우라 대외적인 일에 나서야 할 때가 많다. 평소 내성적인 성격이라 부담스럽다. 다시 태어나면 또 배우를 할 지는 모르겠다."

홍콩=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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