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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잃어버린 지평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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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어린 시절 TV에서 보았던 영화 ‘잃어버린 지평선’은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티베트를 소재로 한 것이다. 1937년 찍은 이 영화는 불로불사의 이상향 ‘샹그릴라’를 묘사했다. 비행기에서 추락한 영국인을 사랑해 샹그릴라에서 함께 빠져나온 처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노파로 변하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샹그릴라는 티베트어로 ‘마음 속의 해와 달’을 뜻한다.

중국 정부는 1997년 티베트 중뎬(中甸)현을 샹그릴라로 지목했다. 16세기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원시 공산주의의 섬나라를 묘사했다면, 샹그릴라는 대공황 이후 서구인이 꿈꾸던 몽환 세계를 그렸다.

해발 4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 사는 300만 명의 티베트인은 독실한 불교 신자다. 내세를 위해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삼보일배를 하며 라싸의 포탈라 궁까지 순례하는 이도 부지기수다. 방이 1000개가 넘는다는 포탈라 궁의 주인은 관음보살의 현신으로 믿어지는 달라이 라마 14세(본명 텐진 가초)다. 원(元)왕조가 선사한 이 칭호에는 ‘바다처럼 위대한 스승’이라는 존경이 담겨 있다. 티베트인은 윤회와 환생을 굳게 믿는다. 텐진 가초 역시 다섯 살 때 라마교 고승들 앞에서 달라이 라마 13세가 즐겨 읽던 경전의 한 구절을 암송하고 그가 썼던 염주·지팡이·북을 고르는 3단계 시험을 통과해 환생자로 인정받았다. 14명의 달라이 라마는 결국 육신이 다른, 한 사람의 영혼인 셈이다.

그러나 올해 72세의 달라이 라마는 가시밭길을 걸어 왔다. 그는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하기 전까지 정치·종교의 최고지도자로 추앙받았다. 그러다 24세 때 중국군의 지배를 견디다 못해 인도로 넘어가 48년째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수년 전부터 중국 정부를 향해 “독립이 아닌 자치도 좋다”며 공존을 모색 중이다. 하지만 중국은 꿈쩍하지 않는다.

달라이 라마는 최근 일본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살아 있을 때 후계자를 정할 것”이라고 말해 파문을 낳고 있다. 자신의 사후에 중국 정부가 후계자 선정을 좌우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600여 년의 전통을 가진 ‘환생 신화’를 포기하려는 것이다. 중국은 “정부 허가가 없으면 불법”이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영국의 여성 저널리스트 클레어 스코비는 일곱 차례의 현지 여행 끝에 쓴 『티베트 순례자』에서 달라이 라마의 심경을 ‘좌절감과 절박감’으로 압축했다. ‘차이나 파워’ 시대에 티베트라는 존재는 수레 앞의 사마귀 신세 같다. 아, 사라져 가는 샹그릴라여.

이양수 정치부문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