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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죽음부르는부실공사관리>9.설계심사 비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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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세계적인 미항(美港)호주 시드니해변에 날렵하면서도 고풍스러운자태로 서있는 오페라 하우스는 관광객의 심금을 울리는 심포니오케스트라같은 건축물로 유명하다.
덴마크 건축가 유론 웃존이 설계한 이 불후의 명작은 국제 현상설계공모 1차심사에서 「수준미달」로 탈락됐다가 뒤늦게 심사에참가한 미국 건축가 에로 사리넨에 의해 끄집어내진 작품이란 점에서 더욱 명성이 높다.
사리넨과 같은 심사위원이 없었다면 세기의 명작 오페라하우스를탄생시킨 웃존의 설계안은 오늘날 건축문화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지못하고 휴지통 신세를 면치 못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건축.토목시설물 심사수준은 어느정도며 심사과정은 과연 어떠한가.당연히 실력에 의해 당락이 판가름나야 할 설계분야에서부터 뇌물공세가 시작된다.
공공시설물의 설계일감은 그동안 수의계약방식으로 몇몇 기성 설계자에게 맡겨지는게 관행이었다.수의계약의 부작용을 개선하고 신진작가를 발굴해야 한다는 강력한 비판을 의식해 「현상공모」에 부쳐진 설계안들도 대부분 심사 과정에서 교수.공무 원.관련전문가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과 특정 설계회사가 결탁,실력보다 로비에 의해 당선작이 제조되는 부패의 악순환을 되풀이해왔다.
설계란 전쟁에 비유하면 「작전계획」(作戰計劃)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작전계획 자체가 로비에 의해 휘둘린다면 아무리 성능좋은 무기와 용감한 병력이 뒷받침된다 한들 무슨 소용일까.승패는보나마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공사에 앞서 추진되는 설계과정에서부터 심사.심의위원들에게 우선 잘라먹히는 로비자금은 「설계비의 5%선」으로 통용된다.
현상설계에서 당선작으로 선정된 작품들 모두가 로비에 의한것은물론 아닐것이다.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동안 주요 현상공모에 부쳐졌던 작품들 가운데 심사후 공개된 자리에서 당선작보다2,3등 작품이 더 우수하다는 지적이 강력하게 제기되는 경우가비일비재한가 하면,로비를 벌였다고 폭로하는 사례까지 등장한다.
지난 80년대초 현상공모에 의해 설계안을 마련했던 경기도 한공공청사의 경우 당초 법무부 고위층의 후원에다 심사위원들에게 엄청난 로비를 벌였던 S건축이 제출한 설계안이 당선작으로 뽑혔지만 실제 시공과정에서는 2등 작품인 I건축의 설계안을 적용,물의를 빚기도 했다.I건축은 자사(自社)작품 무단사용을 들어 소송을 제기할 뜻을 보이자 시행기관은 서울 M지법청사 설계건을수의계약으로 넘겨줘 문제를 무마시켰다.
실력보다 로비에 의해 설계건이 거래되는 관행은 5,6공시절 노골적으로 판을 쳤다.5공 막후실력자의 후광을 업고 부산.경남지방의 공공건축물 설계건을 대부분 독차지해온 Y사는 90년대초설계비만도 20억원에 달하는 B시(市)신축청사 설계건을 차지했다. 당시 설계공모에 참여했던 I건축의 S씨는 『당초 공모계획이 발표되자 마자 Y사가 심사위원들에게 엄청난 로비를 해 이미당선작으로 내락을 받아놓은 상태니 공모에 참여할 경우 Y사를 위한 들러리만 서는 격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나돌 았다』고 증언했다.
80년대 후반들어 갑자기 부상(浮上)한 K사는 교수등 건축설계 심사위원으로 선정될만한 인사들에게 매월 30만~50만원의 뒷돈을 대주는가 하면 설계공모 심사위원 명단을 사전에 알아내 엄청난 자금을 뿌려가며 당선작확보 수법을 쓰고 있 는 것으로 업계에 소문이 파다하다.설계건 확보를 위한 로비공세는 교량등 토목설계에서 더욱 심하다.토목분야의 경우 설계비가 대부분 수십억원에 달하는 대형규모인데다 심사위원들도 한정돼 로비하기가 매우 쉽다는 것이다.게다가 일부 설계회사 는 미리 심사위원을 자사(自社)의 고문처럼 활용할 정도로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심사위원에게 뒷돈을 주지않으면 아무리 설계안이 우수하더라도 당선작에 뽑힐 수 없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
설계회사들이 심사위원들에게 자사의 작품내용을 알리는 방법도 다양하다.T사의 한 관계자는 『80년대 한 교량현상설계에서 심사위원에게 자사작품을 알리는 방법으로 38페이지 둘째줄의 내용을 미리 건네주고는 「눈여겨 봐주십시오」라고 알려 설계권 확보에 성공한 일이 있다』고 밝혔다.
설계회사들이 가장 신경쓰는 사안중 하나는 중앙설계심의등 각종심의다. 설계회사들은 심의위원들에게 잘못 보여 꼬투리가 잡히면설계납품일이 한두달 늦어져 그만큼 손해를 보게되므로 심의위원들을 찾아가 미리 손을 써놓아야 지적사항이 줄어든다.
설계회사들은 설계및 기술심의에서부터 현상설계안의 심사,사후점검등 언제든지 설계에 대해 꼬투리를 잡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대학교수들을 항상 예우해주지 않을 수 없으며, 명절때만되면 공무원 관리하듯 전문가들에게도 별도의 인사를 하고 유력자에게는 매달 월례비조로 뒷돈을 대주기도 한다.
학계쪽의 일방적인 고자세에 대해 Y사의 L상무(기술사)는 『정부가 실제 현장경험이 많은 전문가들의 이야기는 귀담아듣지 않고 이론만을 앞세우는 교수들의 주장에만 귀를 기울일 경우 우리나라의 기술수준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선진기술 과 도저히 경쟁할 수 없게 된다』고 경고했다.
수의계약등 공사수주와 직결되는 건설업체들의 신기술 등록 과정에서도 교수및 연구기관 전문가들의 영향력은 대단하다.건설부가 주관하는 신기술심의위원회에 통과해야 공식적인 신기술로 인정받게되므로 심의위원들의 권한 또한 막강할 수밖에 없다 .
최근 D건설은 이미 일본에서 보편화된 오니준설 관련 기술을 심의위원에게 로비를 벌여 「신기술」로 등록하는데 성공한 반면 S사는 경쟁사인 D.K사의 역로비에 걸려 그만 등록이 좌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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