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불 지르고 불 끄는 교육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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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학부모인 서모(46.서울 송파구 잠실동)씨는 지난주 서울 강남구 대치동 C논술학원에 찾아가 7회 강의에 55만원 하는 논술 강의를 직접 등록했다. 서씨는 "강의를 듣겠다는 학생이 많아 학원에 사정사정해서 등록했다"며 "이 정도면 이 동네에선 저렴한 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학원 옆 K학원은 '6회 강의 99만원' '12회 강의 199만원'을 받았다. 월 200만원을 부르는 학원들도 있었다. 이렇게 고액을 불러도 학생들은 넘쳐났다. K학원 한모 원장은 "수능 등급이 오리무중이니 논술에 학생이 쏠릴 수밖에 없지 않으냐"며 "지난해에 비해 학생 수가 세 배 이상 늘었다고 보면 된다"며 분위기를 전했다.

이러다 보니 올해 초 열기가 주춤해졌던 강남 논술학원가에서는 '이번 입시에서 몇 억원 못 벌면 바보'라는 말이 돌 정도다. 한 학원장은 "이런 연말 특수는 아무래도 수능 등급제가 일등공신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논술 과열 분위기가 확산되자 교육인적자원부가 26일 나섰다. 이달 말부터 2개월 간 전국 시.도교육청을 통해 고액 논술과 개인 과외에 대한 집중 단속을 벌이겠다는 것이다. 현행 규정상 월 21만여원이 넘는 수강료는 고액으로 간주된다. 고액을 받다 적발되면 등록 말소, 세무서 통보 등의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학부모의 등골을 빼는 고액 논술 강의는 단속되는 게 맞다. 하지만 교육부가 뒤늦게 고액 논술을 단속하겠다고 나선 건 '규제의 칼'로 정책 실패를 가리겠다는 처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수능 등급을 몰라 혼란스럽고, 같은 등급에 몰려 논술로 한판 승부를 가려야 하는 수만 명의 수험생이 고액 논술 강의에 매달려야 하는 혼란 상황을 자초한 건 교육부, 더 나아가 현 정부다.

이는 2004년 8월 19일 청와대 회의 당시로 되돌아가면 분명해진다. 당시 청와대 국정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 교육혁신위원회, 청와대 인사들은 모두 수능 5~7등급제 도입을 주장했다. 입시 경쟁을 줄이기 위해 점수를 없애고 등급을 도입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나마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만 "변별력을 위해선 최소한 9등급은 되어야 한다"고 반대했다. 안 전 부총리는 사석에서 "이 정권 사람들은 자기들이 뭘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치열한 입시 경쟁은 엄연한 현실이다. 이를 무시하고 등급이란 '무딘 칼'로 입시 경쟁을 없애겠다는 건 현실을 무시한 교육 정책일 뿐이다.

교육부의 이번 '고액 논술 단속'도 썩은 뿌리는 놔둔 채 가지치기만 하려는 땜질 처방에 불과하다. 교육부가 왜 차기 정부에서 구조조정 1순위라는 지적을 받는지 알 만하다.

강홍준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