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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수다·응석·궤변 … UCC세대 소통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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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어린이용 영상물의 단골 주연 대신 ‘진짜 배우’가 되고 싶은 혁권(右)은 특기인 복화술로 의외의 활약을 하게 된다. 부산영화제의 한 파티에서 혁권이 유명 여배우(김보경)와 복화술로 노래하고 있다.

‘은하해방전선’은 모처럼 만나는 재기 발랄한 한국 영화다. 꽤나 수다스럽고, 그래서 산만하기도 하지만 신인 감독의 재기가 발산하는 기운생동은 이 영화의 이런저런 흠집을 눈감아 주고 싶게 만든다. 뭔가 새로운, 뭔가 젊은 느낌의 한국 영화를 기다려 온 관객이라면 기꺼이 시식을 권하고 싶은 별미다. 특히 속칭 ‘코드’가 맞는 관객이라면 쉴새 없이 키득거릴 수 있는 코미디다.

SF를 연상시키는 제목을 붙었지만, 실상은 연애와 영화 모두 악전고투 중인 초짜 영화감독의 청춘삽화다. 소심하고 말 많은 스물아홉 신인 감독 영재(임지규)는 여자친구 은하(서영주)로부터 이별을 통고받는다. 준비 중인 영화에 투자를 받네, 일본 스타를 캐스팅하네 하면서 제작자·스태프 등등과 부산영화제로 내려가지만 머릿속에는 은하와 연애하던 순간이 수시로 떠오른다. 사실 영재의 영화 역시 답보 상태다. 실어증에 걸린 주인공이 쌍둥이와 번갈아 사랑에 빠진다는 황당한 줄거리만 정해졌을 뿐 관계자들은 저마다 제멋대로 살을 붙이곤 한다.

영화제의 또 다른 동행은 배우 혁권(박혁권)이다. 우스꽝스러운 우주복을 입고 어린이용 특촬물(그 제목이 ‘은하해방전선’이다)에 주인공 ‘혁권 더 그레이트’로 출연하는 처지인데, 이제는 ‘진짜 영화’를 하겠다며 단편영화로 인연을 맺은 영재의 장편 데뷔작에 출연 기회를 노린다. 혁권의 특기인 복화술은 엉뚱한 계기로 위력을 발휘한다. 스트레스 탓인지 영재가 하루아침에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는 증세를 보이게 된 것. 일본 측과 중요한 만남에서 혁권은 영재의 벙긋대는 입 모양에 맞춰 대신 목소리를 내는 역할을 한다.

이 영화의 재기가 특히 돋보이는 대목은 소리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수다스러운 영재가 실어증에 걸리는 것도, 실어증 상태에서 입을 열면 말 대신 ‘삐리리’하는 악기 소리가 나오는 것도, 마이크 같은 이물질을 통과하면 제대로 말이 들리는 것도 저마다 흥미로운 해석과 장면을 만들어 낸다.

물론 소리 중에 영재의 언변을 빼놓을 수 없다. 우디 앨런을 연상시키는 이 수다스럽고 자기중심적인 인물은 줄곧 영화와 연애에 대한 달변과 궤변을 들려 준다. 말만큼 생각도 많은 그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대화는 가끔 판타지로 스크린에 구현된다. 지하철 안의 손님들이 어느 순간 합주단이 되는가 하면, 영재의 영화 구상을 듣고 있던 낯선 이들이 불현듯 대화에 끼어들곤 한다.

영화의 주인공을 신인 감독으로 설정한 이 영화는 실제 메가폰을 잡은 신인 윤성호(31) 감독의 복화술처럼 보인다. 좀 과욕을 부려 해석하자면, 그의 시각에서 그려낸 자기 세대의 자화상 같다. 말이 좋아 감독이지 본격적인 일(영화)에 진입하지 못하고 전전하는 영재의 처지는 이른바 ‘88만원 세대’(20대 대졸 취업자의 상당수가 월급 88만원의 계약직이 된다는 얘기)를 연상시킨다.

연애와 영화라는 기둥줄거리를 세웠으되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 대신 현재와 과거, 상상과 실제를 문턱 없이 오가는 이 영화의 진행 방식은 이른바 ‘UCC세대’ 감독답다. 그 중에도 영재의 취향은 자신의 말마따나 ‘무임승차한 좌파’다. “먹기 위해 사는 걸까, 살기 위해 먹는 걸까”로 시작한 하릴없는 고민타령은 “부시가 싫은 걸까 미국이 싫은 걸까”로 이어지고, 군사정권 시절의 대통령이나, 부산영화제에 깜짝 출현했던(이 영화의 촬영 당시에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상황인데, 실제가 됐다) 대선 후보도 단역급으로 언급된다.

영화 속에는 부산영화제에서 단편영화가 상영된 뒤 영재와 혁권이 ‘관객과의 대화’를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혁권은 영재가 일러준 대로 관객들의 모든 질문에 ‘소통’을 말머리로 대충 그럴듯한 대답을 해낸다. 그렇게 어디든 갖다 붙일 수 있는 소통이라는 단어는 이 영화에도 키워드다. 영재의 가장 큰 욕망 역시 연인과, 관객과의 소통이다.

다만 영재의 자기중심적인 소통 방식은 영화의 시작과 끝에 그다지 달라져 보이지 않는다. 청춘영화이되 성장영화로는 보이지 않는 대목이다. 영화 속 대사를 빌리자면 영화와 연애의 공통점은 ‘응석’이란다. 영재와 그의 세대는 응석에서 벗어날 별다른 유인책이 아직 없는 것 같다. 영화 속 궤변을 하나 더 빌리자면 영화와 도넛의 공통점은 ‘핵심을 떼야 잘 팔린다는 것’이란다. 주제의 응축력이나 플롯의 흡입력으로 판단하자면, 이 영화는 핵심이 좀 비었다. 그래도 먹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영화는 1억원의 저예산으로 만들어졌다.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에 이어 독립영화만 두 번째 주연인 임지규, 드라마 ‘하얀거탑’으로 유명세를 얻은 박혁권 등 캐릭터에 빛을 더하는 고른 연기 역시 주목할 만하다. 29일 서울 홍대입구 상상마당·인디스페이스·CGV 인디관(강변·상암)·대구아트시네마 등 개봉.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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