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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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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강남 좌파’라는 말이 있다. 몸은 상류층인데 의식은 프롤레타리아인 사람들을 일컫는다. 애초 범여권 386세대 인사들의 자기모순적 행태를 비꼬는 말로 쓰였으나 이제는 점차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생각은 좌파적인데 생활수준은 강남 사람 못잖은 이들”을 총칭한다(강준만 전북대 교수). 물론 이때 강남은 실제 거주 지역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생활수준을 향유하는 계층을 말한다. 한마디로 진보적 이념을 가진 고학력·고소득층이다.

다양한 직업군이 있지만 특히 문화·학계 쪽 인사가 많다. 정치·경제적 의식보다 문화 의식 면에서 더욱 급진적이다. 그래서 ‘문화 좌파’라는 말도 나온다. 민주노동당원인 박찬욱·봉준호 감독, 영화배우 문소리씨 등이 대표적이다.

사실 문화계의 의식적 급진성은 동서 불문이다. 문화라는 것 자체가 기성의 전복이니 당연하다. 심지어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할리우드 스타들도 정치적으로는 보수보다 진보 쪽이다. 그래서 보통 ‘할리우드=민주당 텃밭’으로 분류된다. 유수 영화제가 사랑하는 영화들도 좌파 전통이 강하다. 이 때문에 이명세 감독 같은 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보의 좌파 미학이 동서를 막론하고 영화계의 지배적 담론”이라고 말한다.

물론 의식과 물질이 따로 노는 이 같은 경향은 때때로 가진 자의 위선이나 허위 의식이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양심적 부르주아로 통칭되는 지식인·전문직 종사자들의 의식적 진보성이 수많은 사회운동과 변화의 동인이 돼 왔음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어찌 보면 강남·문화 좌파라는 존재 자체가 우리 사회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그만큼 다양해졌음을 뜻하기도 한다. 정치·경제·문화 등 영역과 이슈별로 입장이 다른 것이 이율배반과 자기모순이라기보다 이념적 다원화의 증거라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진보이지만 자기 이익과 관련된 교육·기업 규제·정규직·세금 문제 등에 대해서는 보수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대선의 계절. 정당·정책은 없고 추문과 어지러운 의혹 속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지만 시간은 흐르고 대선일은 다가온다. 참여정부의 출범에 크게 기여했으나 강남이라는 출신 성분 때문에 질타당했고, 동시에 386의 변절과 무능력에 실망했던 강남·문화 좌파의 선택은 무엇일까. 어쩌면 보수와 진보의 경계에 모호하게 걸쳐 있으면서 고정된 이념의 자장 안으로 쉽게 포섭되지 않는 이들의 선택이 이번 대선의 결정적 변수가 될지 모르겠다.

양성희 문화스포츠 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