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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수능·내신 등급제 폐지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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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얼마 전 수능 시험이 끝난 뒤 대입 현장은 난리다. 입시학원들의 주먹구구식 대입 정보가 판을 치고, 학부모들은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학원으로 달려가고 있다. 논술 사교육 시장은 연일 장날이다. 학생·학부모들이 수능 예상 성적과 지원 가능 대학을 전혀 알 수 없어 벌어지는 일이다. 이것이 노무현 정부가 3년 전 천지개벽이라며 내놓은 대입 개혁의 첫 결과다.

주범은 수능·내신 등급제다. 점수 대신 성적 분포에 따라 9단계로 구분한 것이다. 상위 4%까지는 1등급, 차상위 7%는 2등급이란 식이다. 교육 현장을 모른 채 평준화 이념만 고집해 온 노 대통령의 그릇된 교육관이 낳은 산물이다. 성적 변별력이 약화되면 우수 학생들이 여러 대학에 분배돼 대학이 평준화된다는 의도, 입시 경쟁이 완화돼 사교육이 줄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거꾸로였다.

시험의 생명은 공정성·합리성·정확성·변별력에 있다. 등급제는 이것이 결여된 제도였다. 100점이든 80점이든 상위 4%면 1등급인 반면 조금만 벗어나도 2등급이다. 과연 공정하고 합리적인가. 이번 수능의 일부 과목에선 한 문제만 틀려도 2등급이 되는 현상이 벌어진다고 한다. 등급 차이는 타격이 더 크다. 억울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또 다른 피해자는 다른 과목은 다소 뒤처져도 특정 과목에서 매우 뛰어난 학생이다. 모든 과목에서 4%(약 2만3000명) 안에만 들면 가장 유리하다. 하나만 잘해도 대학 가는 것이 아니라, 전부 잘해야 대학 가는 제도가 등급제다. 특정 분야마다 창의적 인재가 필요한 다양화 시대에도 역행한다.

대학들은 처음부터 등급제를 못 믿어 논술·면접 등을 강화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수능·내신도 무시할 수 없어, ‘죽음의 트라이앵글’(수능·내신·논술)과 ‘저주받은 89년생’이란 섬뜩한 말까지 생겼다. 이러니 노 정부 들어 사교육비가 부쩍 늘어난 것이다.

노 대통령은 가진 자를 미워하면서 서민을 위한다는 정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잘못된 교육 정책의 최대 피해자는 바로 돈 없는 서민이다. 획일적인 평준화 정책으로 공교육은 망가지고, 사교육 부담은 갈수록 늘어 허리가 휠 정도다. 요즘 ‘대입 컨설팅 60만원, 논술 사교육 200만원’이란 말이 나돈다. 서민층으로선 속 터질 일이다. 이러니 조기 유학생이 늘고, 그러지 못하는 서민층 자녀에겐 갈수록 희망이 없다. 가난의 고리를 끊는 것이 아니라, 빈부 격차의 대물림을 더욱 확고히 하는 교육인 것이다.

등급제는 빨리 폐지돼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대입 제도 변경안은 법에 따라 3년 전에 예고돼야 하기 때문에 대입 자율화로 급한 불을 꺼야 한다. 대학들이 다양한 전형 방법을 도입하면 수능·내신·논술 비중이 줄고, 대입 방식이 다양해져 등급제의 폐악을 줄일 수 있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조차 그저께 대입 자율화가 돼야 대학 교육이 정상화된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노 대통령은 곧 물러난다. 새 대입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