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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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떠난 자와 남는 자(38) 『꼭 그믐날이어야 할 이유는 없어.오늘 아니면 내일,그런 식으로 날을 잡아야지,날짜 정해놓고 나면 오히려 일 그르칠 염려가 커지지 않겠니? 내 생각에는 그렇다만….』 태성이 길남의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그믐 전후 어느 날로만 정하자.무슨 들고 가야 할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달랑 불알 두 쪽 달고 튀는 건데 안그렇냐?』 그래,그건 네 말이 틀리지 않는다.그러나… 고개를 숙이며 길남은 화순이를 떠올린다.
그때 태성이 불빛 가득한 숙사 쪽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자.』 『뭔데?』 『널 믿어도 좋겠냐?』 태성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길남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상종 못 할 놈이네.』 태성이 길남의 손을 움켜잡았다.
『해 본 소리다.마음에 담지 마라.』 『조선사람 뒤나 캐고,찔러나 대면서 살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고도 비단옷 입고 살았을 거다.』 『그냥 한 소리라는데 뭘 그렇게까지 노여워하고 그러냐,미안하다.』 『할 말 안 할 말이 따로 있는 거지.그래 내가 이제와서 너 도망치려고 한다고 찔러넣어서,내가 뭐가 되겠냐.그럴 거면 아예 따로 튀자.누가 먼저일지는 모르겠다만,없었던 일이다,모르는 일이다 하면 될 거 아니냐.』 『노여움 풀어라.그런 말을 꺼낸 건 전적으로 내가 잘못이니까.』 『없던 소리로 치자 그거냐?』 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길남이 입을 굳게다물며 태성이를 노려보았다.
『뱉어 놓은 말이 어디로 가겠냐?』 『너 참 더럽게 까탈스럽다.그냥 해 본 소리라고 하는데도 그걸 물고 늘어질 건 또 뭐냐.』 『우리가 하려는게,이게 말이다.어디서 거렁뱅이 투전하는거쯤으로 넌 생각하는 거냐.목숨 건 일이다.목숨을.』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들면서 태성이 말했다.
『그래.정말 미안하다.다른 뜻이 있었던 건 아니니까 그 얘기는 이쯤에서 좀 덮어둘 수 없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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