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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의 국토박물관 순례] 12. 경주 괘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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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한 해에도 서너 차례 다녀오는 경주지만 언제 누구와 가도 경주는 무한한 예술적 감동의 희열과 민족적 자랑을 안겨주는 한국미술사의 성지(聖地)다. 그러나 경주에 갈 때마다 나를 괴롭고 안타깝게 만드는 것은 그 긴긴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환상적인 조명 속의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베니스 성 마르코 광장의 야간 카페들, 파리의 개선문과 야경… 그런 한 밤의 프로그램이 경주엔 없는 것이다. 더욱이 호텔.여관들이 시내에서 동떨어진 보문단지와 불국사 관광단지에 몰려있으니 할 수 없이 찾아가는 곳이 술집과 노래방뿐이다. 지난 가을 명지대 미술사학과 경주답사 때도 나는 여지없이 이 문제에 봉착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눈을 부릅뜬 무신상(왼쪽). 앞발을 슬쩍 들고 포효하며 몸을 젖힌 돌사자(오른쪽).

나의 답사행에는 언제나 한두명의 지인이 자리를 함께 하는데 그때는 부산에 있는 일암관(日巖館) 주인이 동참했다. 그는 본시 잘 알려진 기업인이지만 미술감상에 급수가 있다면 가히 9단의 경지에 들어갈 탁월한 안목과 미술사적 지식의 소유자다. 답사 둘째 날 경주 남산을 일곱시간 걸려 종주한 뒤끝인지라 저녁을 마치고 제각기 흩어지려는데 일암관이 내 심사를 건드렸다.

"유교수와 함께 와도 신라의 달밤이 이렇게 싱겁단 말입니까?"

그는 워낙에 나를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뭐가 나와도 나온다는 것을 알고 찔러보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나도 지지 않고 또 그도 지지 않는다.

"오늘은 그믐이라 달빛이 없습니다."

"교수님,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감상하는 실력이 있다는 것을 모릅니까."

"그렇다면 한석봉 엄마가 아들 시험 보듯 데려갈 곳이 하나 있긴 하지."

"갑시다."

*** 불국사서 15분 거리 … 발길 뜸해

그리하여 나는 부산에서 끌고온 그의 차를 타고 서양미술사를 가르치는 이지은 선생과 함께 괘릉으로 향했다. 괘릉은 불국사에서 차로 불과 15분이면 다다르는 지근거리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주 방문객 중 겨우 10%만이 괘릉에 다녀가는 현실을 나는 항시 안타깝게 생각해 왔다. 그 이유는 괘릉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지 않고, 현재 국보나 보물이 아닌 사적 제26호로 지정돼 있어 일반인의 인식이 높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재위 785~798)의 무덤인 괘릉은 한 마디로 경주에 있는 1백55개 고분 중 능묘정원이 가장 아름답고, 그 능묘조각은 통일신라 리얼리즘 조각의 진수라고 할 만하다. 사실 석굴암과 경주 남산의 조각들은 모두 불교 조각이기 때문에 리얼리즘 조각이라는 말이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괘릉에 있는 각기 한쌍의 문신석과 무신석, 그리고 두쌍의 돌사자는 정확한 묘사를 요구하는 인체조각.동물조각이기 때문에 사실성의 관점에서 감상하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8세기 리얼리즘 조각의 꽃이라 할 만한 것이다.

서역인의 얼굴로 유명한 무신석은 부릅뜬 눈과 굳게 다문 입의 표현도 박진감있지만 팔뚝까지 걷어붙인 소매의 표현과 몸을 15도 정도 비튼 자세의 설정이 압권이다. 그로 인해 무신상에는 강한 동감(動感)이 일어나고 금방 앞으로 다가올 것 같은 생동감이 살아나 있다.

이에 반해 문신석은 정면 정관의 정지감에 충만해 있다. 그러나 지그시 내려다보는 눈과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읍하는 긴장된 자세, 그리고 살짝 올라온 발끝의 표현으로 거기에 내재된 충만감과 양괴감이 마치 내공의 힘이 가득한 것처럼 느껴진다.

네 마리 돌사자 중 두 마리는 앞발을 곧추 세우고서 정면을 응시하고, 두 마리는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을 포착했다. 그것은 돌사자들이 바라보는 방향이 동서남북 사방의 방위를 상징케 하는 기발한 구상에서 나온 것이다. 입을 다물고 앞을 응시하는 정면 향의 사자는 몸을 한껏 움츠리고 앞발을 굳게 딛고 있어 문신석 같은 정지감이 강조돼 있고, 포효하며 몸을 젖힌 사자는 앞발을 슬쩍 들어 다음 동작으로 이어질 동세를 강하게 암시한다.

괘릉의 조각들은 이처럼 낱낱 조각에서 리얼리즘의 극치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정지감과 동감의 교차로 능묘 전체에 말할 수 없는 생동감과 활기를 느끼게 한다.

내가 달빛도 없는 그믐밤에 괘릉으로 안내할 때는 그저 담 너머로 능묘의 분위기만이라도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괘릉에 당도하니 대문이 빠끔히 열려 있는 틈새가 자동차 불빛에 들어왔다. 가만히 다가가 문을 미니 대문이 활짝 열렸다. 모두들 기쁜 나머지 우리의 정성에 신라의 영혼들이 감복했나 보다고 스스로를 치하했다. 그믐밤이었지만 돌조각의 형상만은 그대로 감지할 수 있었다. 일행 모두 의연한 인체조각과 절묘한 동물조각에 감탄하며 보름달이 아닌 것과 손전등 하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순간 이지은 선생이 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뚜껑을 젖히자 거짓말처럼 석인상 얼굴이 환하게 드러났다. 우리는 모두 휴대전화 뚜껑을 열고 석인상을 사방에서 비추며 조각의 디테일을 음미했다.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조각은 더욱 생생하게 드러났고 우리는 좀더 밝은 빛을 원하고 있었다. 이때 일암관은 대문 밖으로 나가 자동차 상향등을 켜 괘릉 안쪽을 비추니 무신상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배우처럼 화려하게 자태를 드러냈다.

*** 능묘정원의 아름다움도 으뜸

그제야 직성이 풀린 듯 모두들 일장소견을 말했다. "대리석도 아닌 화강암을 이렇게 능숙히 다루다니." "돌사자 다리 사이를 공허공간으로 파냈네요." 그런 중 일암관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엇보다 이 조각이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하고 장식적으로 흐르지 않은 것이 감동스럽습니다. 여기서 디테일이 더 나가면 짜증스럽게 되거든요."

확실히 그는 예술감상 9단이었다. 미술사학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 전기 고전주의가 헬레니즘조각보다 우수하게 평가되는 것은 바로 그점이었다. 이어 미술감상 9단은 서양미술사 선생에게 진지하게 묻는다.

"이선생. 이런 입체조각을 할 때 조각가는 옆에다 진흙 같은 것으로 실제 크기의 모형을 만들어놓고 합니까?"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만, 미켈란젤로는 직접 돌덩이를 파고 들어갔다고 해요. 그는 돌 속에 갇혀 있는 형상들이 모습을 드러내도록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했다고 했거든요."

바사리가 쓴 '르네상스미술가열전'을 보면 미켈란젤로는 항상 "손은 일하고 눈은 판단하기 때문에 손이 아닌 눈의 잣대(컴퍼스)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아마도 이름모를 통일신라의 조각가들도 그들 눈의 훌륭한 잣대가 있었으리라.

우리는 그런 대화 속에 아쉬운 괘릉을 뒤로하고 대문 쪽으로 향했다. 그 순간 괘릉의 돌담 기와지붕 너머로는 러브호텔 네온사인의 하트형상이 오색으로 뒤바뀌며 번뜩거린다. 그 황당한 망측스러움이라니. 이 기막힌 어긋난 풍광을 보며 미술감상 9단이 고수레하듯 한마디 던졌다.

"마, 됐다. 네가 데미안 허스트보다 낫다." (데미안 허스트는 영국의 유명한 설치미술가로 얼마 전 아모레 퍼시픽이 기획한 '헤라'전에 초대돼 우리에게도 작품이 소개된 바 있다.)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문화예술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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