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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IReport] '적자 정부' 막는 헌법 조항 만들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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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선진국은 대부분 정부 규모가 크고 복지제도가 잘 돼 있다. 그래서 우리도 큰 정부를 지향하는 게 올바른 선택이라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의 선진국들이 잘사는 것은 자유시장 덕분이지 큰 정부 때문이 아니다. 선진국들의 정부 규모가 커진 것은 빠른 성장의 덕택으로 선진국이 된 이후였다. 인류의 긴 역사에서 큰 정부는 1970년대 이후의 극히 최근 현상이다. 큰 정부를 바탕으로 복지정책을 최우선으로 삼은 나라치고 선진국이 된 나라는 없다.

왜 큰 시장 작은 정부여야 하는가?

첫째, 큰 정부는 타율의 확대를 의미하고 큰 시장은 자율의 확대를 의미한다. 선택의 자유를 확대하는 큰 시장이 인간의 본성에 맞고 개인의 창조력을 활성화시킨다. 둘째, 역사적으로 작은 정부-큰 시장이 보다 나은 대안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큰 정부-작은 시장이 국민을 잘살게 한 경우는 발견되지 않는다. 정부는 문제의 해결사이기보다 문제의 원인 제공자였다. 셋째, 정부는 시장에 비해 태생적으로 생산성이 떨어지고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생산성이 낮은 정부의 팽창은 국가 전체의 생산성을 하락시킨다. 넷째, 시장은 실패하더라도 그 영향이 당해 개인에게 한정되는 데 반해 정부 실패의 경우 국민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 다섯째, 오늘날과 같이 세계화·정보화 시대에는 작은 정부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작은 정부를 유지하는 것이 세계와 교류하는 데 유리하고 지식 정보화 시대에 적극적 적응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식으로 생각하면 세상의 모든 일은 정부가 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정부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따져 봐야 한다. 자원을 배분하는 일은 시장이 할 일이지 정부가 할 일이 아니다.

정부는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시장기구가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 정부는 각종 정책을 통해 경제에 개입한다. 그러나 시장 실패는 정부 개입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정부 부문에서는 시장 부문에서와 같은 효용 극대화나 이윤 극대화 등의 동기부여가 전혀 없거나 충분하지 않기에 최선의 결과가 도출되지 않는다. 정부의 실패는 정부의 정책결정자가 무지해서도, 나쁜 의도가 있어서도 아니다. 아무리 잘 하려 해도 공공서비스에 대한 선호가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 한, 그 서비스의 투입과 산출이 제대로 계측되지 않는 한, 정책과 관련한 지식과 정보가 불완전한 한, 그리고 정책결정자 개인의 목표나 편견이 개입되는 한, 정부는 구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경제가 어렵다. 국민 모두가 힘들어 한다. 그래서 경기를 살리고, 일자리를 늘리고, 삶의 질을 높이는 등 우리 사회 핵심 과제 해결을 정부더러 하라고 한다. 그것도 큰 정부로 하라고 한다. 이는 잘못된 접근이고 처방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자리 창출이든 복지든 양극화의 해소든 그 첩경은 기업 투자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기업 투자를 저해하면서 경기·일자리·복지를 내세우고 있다.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투자의 활성화는 국내 기업의 투자 여건을 과감히 개선해 주고 세계의 자본과 기술을 우리나라로 끌어 와야 가능하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거의 모든 나라에서 재정이 당면하는 가장 큰 문제는 재정 규모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적자 예산을 편성함에 따라 국가 채무 또한 끝없이 늘어나는 것이다. 재정 규모 확대와 재정 적자 지속은 재정 자체가 지속 가능하냐는 문제와 더불어 경제 전체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문제까지 야기시킨다.

198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성장이 둔화되는 가운데 복지지출이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이 늘어나는 복지지출을 가뜩이나 성장 둔화로 줄어드는 조세 수입으로 충당하는 과정에서 재정적자와 국가 채무가 확대됐다. 큰 정부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각종 문제의 원인임이 밝혀짐에 따라 조세에 대한 정치적 저항이 거세졌으며 작은 정부와 규제 완화로 선회했다.

그래서 세계 각국은 국민적 합의로 재정 운용의 원칙을 바로 세우고 정부 지출의 확대를 억제하기 위해 정치적 영향의 개입 여지를 차단하는 노력을 해 왔다. 그 결과가 재정 규모 확대와 만성적 재정 적자에 대해 새로운 형태의 강력한 ‘총량적 재정규율 제도’다.

지금까지 채택되거나 논의된 재정규율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된다. 세출에 관한 규율(expenditure rules), 재정 적자에 관한 규율(deficit rules), 국가 채무에 관한 규율(debt rules), 그리고 정부 차입에 관한 규율(borrowing rules) 등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재정건전성·경기안정성·행정투명성 측면에서 그중 세출 규율이 가장 우월하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도 이제 총량적 재정 규율의 도입을 검토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그중 세출 규율은 ‘세출 규모의 증가율이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성장률 이내여야 한다’, 재정 적자 규율은 ‘재정 규모에 대비해 재정 적자가 **%를 넘을 수 없다’, 국가 채무 규율은 ‘GDP에 대비해 국가 채무가 **%를 초과할 수 없다’ 식으로 마련돼야 한다.

더 이상 예산 편성과 심의를 관료나 국회의원의 자의적 판단에 맡길 수 없다. 2001년에 시도된 ‘재정건전화특별법’ 같은 법률을 제정하거나 ‘국가채무관리위원회’를 두거나 또는 국가재정법에 특정 조항을 삽입하는 등의 미봉적인 접근으로는 재정 건전화가 도모되기 힘들다. 여전히 재정 활동에 정치적 입김이 개입할 소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향후 헌법 개정 과정에서 총량적 재정 규율을 헌법의 기본조항으로 포함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최광 한국외국어대·경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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