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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크리스마스에도 써니는 나타나지 않았다.메리 크리스마스 앤드 해피 뉴 이어 아래에 써니의 이름이 쓰인 카드는 어디에서도 날아오지 않았다.
써니엄마와 내가 여기저기를 찾아다닌 건 크리스마스와 해피 뉴이어 사이의 며칠 동안이었다.
『실종자 가족 협의회라는 단체가 있다고 해서 찾아가 봤어.』써니엄마가 경인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운전석 옆자리의 내게 말했다. 『거기 가니까 나같은 엄마들이 하나둘이 아니더라구.놀랐어.
매년 3만명씩이나 실종자가 생기고 있다는 거야.말이 돼…? 전쟁 중에 있는 것도 아니구 나라가 혼란에 빠진 상태도 아닌데,글쎄 멀쩡한 대한민국에서 일년에 평균 3만명이 증발 해버린다는거야.』 『납치당한다는 이야긴가요?』 나도 기가 막히는 이야기였다. 『꼭 그런 건 아니구… 가출도 있고 그런가봐.어느날 갑자기 가족들로부터 사라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거지.』 써니엄마가 차를 세운 곳은 인천 외곽의 유난히 높은 담장 아래였다.3미터 가까운 높이의 담장 위에는 또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검정 페인트를 칠한 굳게 닫힌 쇠문이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주었다.차에서 내려 가까이 가보니「부녀기술양성원 」이라는 간판이보였다. 『길거리나 술집같은 데서 몸을 팔거나 하는 아가씨들을잡아다가 기술을 가르쳐주는 곳이래.그런데 엉뚱하게 오해를 받고잡혀온 멀쩡한 아가씨들도 가끔 있다는 거야.실종자가족들이 가보라고 했어.』 쇠문에는 초인종이나 그런 것도 없었다.큰 쇠문을손바닥으로 마구 두드려대니까 안경을 낀 오십대의 여자가 쇠문 한구석에 난 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써니엄마가 누구라고 밝히면서,미리 연락이 와있을텐데요 라고 하자 안경낀 여자가 「 따라오세요」라면서 다시 쪽문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섰다.써니엄마와 나도 등을 구부리고 쪽문을 통과했다.
운동장같은 공터는 아주 깨끗했는데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성냥갑을 뉘어놓은 것처럼 생긴 멋없는 건물 안으로 안경낀여자가 걸어들어갔다.그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서 한 사무실로 들어섰다.
『이게 지난5월부터의 입소자 명단이에요.연락을 받고 찾아봤지만 조선희라는 아가씨는 없었어요.』 써니엄마와 내가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안경은 벌써 책상에 앉아 있다가 명부 하나를 우리쪽으로 내밀면서 그랬다.
『한번 직접 둘러보게 해주겠다고 그러셨다지요….』 안경이 냉랭한 표정으로 일어서서 다시 한번「따라오세요」라고 했다.사람들이 아무도 없는줄 알았던 건물 안에는 수백명 아니면 천명도 넘는 젊은 여자들이 가득 차 있었다.큰 홀마다 원생들이 입는 유니폼 차림의 아가씨들이 재봉틀을 돌리거 나 미용실습을 하거나 하고 있었다.단정한 모습들이었는데 그녀들이 대부분 한때 몸을 팔던 아가씨라고 하니까 느낌이 이상했다.거기에 써니가 섞여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오만가지 생각들이 떠올라서 괜히 울적해져버렸다.
그곳에도 쉬는 시간이 있는 모양이었다.안경을 따라 써니엄마와내가 계단을 내려오는데 누군가 스쳐가면서 내 손을 얼른 잡았다가 놓았다.뒤돌아보니 말총머리를 한 아가씨였고 내 손에는 쪽지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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