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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기금 독립 운용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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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정부가 민간으로 독립시키겠다던 국민연금기금 기금운용위원회를 대통령 직속 위원회로 만드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기금운용위를 대통령 직속으로 두되 위원회를 민간인 신분으로 유지하는 방식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운용은 민간 전문가에게 맡겨 운용의 독립성은 최대한 보장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 조직 내에서 민간전문가들의 의견이 독립적으로 반영되기가 쉽지 않다. 기금운용위원회의 지원조직이 만들어져 공무원들이 전문가들을 좌지우지하는 상황도 우려된다. 특히 경제부처의 입김이 작용할 때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자산운용은 경제부처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민간조직으로 만들어진 한국투자공사마저도 전문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은 시사하는 바 크다.

그렇다면 굳이 정부가 개입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큰 이유는 국가 경제운용의 틀 안에서 자산배분을 고려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민간으로 독립시키겠다는 것이었으나 취지가 퇴색한 것이다.

연금기금에 대한 정부 간섭을 배제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다. 우리도 기금운용의 독립성·전문성·자율성을 높여 가입자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원래 취지에 맞게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금운용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법안은 거대연금의 효율적 운용을 담보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좀 더 심도 있는 논의를 거쳐 보완될 필요가 있다. 현재 국민연금기금 운용이 안고 있는 문제는 기금운용위원회의 전문성·독립성 결여뿐 아니라 국민경제 규모에 비해 과도하게 큰 거대기금의 문제다.

연금의 수익성은 주식과 채권의 자산배분에 의해 90% 이상 결정된다. 운용에 있어 그만큼 자산배분이 중요하다. 올해처럼 증시가 활황인 경우 주식 투자 비중을 10%만 높였더라면 전체수익률은 5% 높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연금과 같은 거대기금의 자산배분이 한 곳에서 이루어지게 되면 의사결정자는 주식과 같은 위험자산에 대한 투자 비중을 가능한 한 줄이려 할 가능성이 크다. 주식에 투자했다가 수익률이 떨어지면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만 안전자산에 대한 투자 비중을 늘린 경우에는 적어도 큰 비난은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올해 국민연금의 주식에 대한 투자비중이 15% 정도에 그쳤지만 이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다만 결과적으로 주식에 대한 투자 비중을 높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표하는 정도다. 일반 펀드도 펀드 규모가 커지면 운용이 어렵고 수익률이 떨어지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런 문제는 대규모의 자금운용이 단일 의사결정 주체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데 있다. 즉 의사결정 주체를 다양화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200조원이 넘고 10년 내에 1000조원에 육박하는 대규모 자산에 대한 배분을 한 곳에서 행한다면 그 부담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따라서 기금운용공사를 적절히 나누고 자산배분에 대한 의사결정을 각 운용단위에서 행하도록 하는 것이 대안이다.

적절한 규모로 나눈다면 자본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줄어들어 자산운용의 유연성과 자유도가 증가할 것이며, 자산배분의 오류에 대한 부담도 줄일 수 있다. 각 운용단위가 자체적인 시장 전망에 기초해 자산배분을 행한다면 어느 한 곳의 자산배분이 잘못됐다 하더라도 연금 전체의 수익률이 크게 하락할 위험은 작아진다. 이에 따라 각 운용단위는 적극적인 자산배분이 가능해져 지나치게 안정성 위주로 운용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각 운용단위의 자산배분 능력을 평가할 수 있고, 성과평가를 통해 운용기관 간의 자산배분 경쟁을 유도해 자산운용의 효율성을 제고시킬 수도 있다.

이 경우 기금운용위는 자산배분의 권한을 각 운용단위에 일임하고 전체 운용단위의 리스크 관리와 성과평가를 통해 기금운용 단위를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준행 서울여대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