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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두우시시각각

이명박의 운(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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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약점이 장점으로 바뀌고, 장점이 약점이 된다. 위기 속에 기회가 있고, 기회 속에 위기가 숨어 있다. 이는 궁지에 빠졌을 때 자신을 격려하거나 잘나갈 때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한 말만은 아니다. 직장생활을 하거나 장사나 사업을 하면서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역설이 가장 자주 나타나는 곳이 정치의 세계다.

말이 유창하다는 건 분명히 장점이다. 정치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종종 이런 상식이 뒤집히는 게 정치다. 평생 숙적관계였던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장단점이 극명하게 대조됐다. 행동력과 정치적 통찰력에서 YS가 앞섰다면, 미래에 대한 비전과 논리력에선 DJ가 우위였다. 말솜씨는 단연 DJ가 뛰어났다. ‘YS가 구사하는 단어는 200개를 넘지 못한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DJ는 그 유창한 말솜씨 탓에 ‘말을 자주 바꾼다’ ‘신뢰할 수 없다’는 덤터기를 썼다. 거꾸로 YS는 어눌한 듯한 언변 덕택에 말을 바꾼 사례가 적지 않았음에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맞붙은 조순 전 경제부총리와 정원식 전 총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정 전 총리의 뛰어난 언변은 오히려 신뢰감의 저하를 가져왔다. 이번 대선 후보 중 단연 돋보이는 말솜씨를 지닌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도 아마 이런 역설을 절감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운이 좋기로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따를 사람이 없다. 국회의원으로서의 그는 인상적인 의정활동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서울시장 재임 시 추진한 청계천 복원사업과 버스 전용차로제 등이 대박을 터뜨렸다.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도 그는 운이 따랐다. 위기 때마다 대형 사건이 터져 국민의 시선과 관심이 다른 곳으로 옮아갔다. 7월 초 주민등록 위장전입 사실이 불거지고 BBK 의혹에 시달리고 있을 때 신정아 학력위조 사건이 터졌다. 7월 말 도곡동땅 의혹으로 지지율이 하락곡선을 그리고 있을 때 아프가니스탄 인질사건이 발생했다. 거기에 8월 초에는 남북 정상회담 발표까지 더해졌다. 적군까지 도와주는 판이니 싸움에서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는 그렇게 한나라당 후보가 됐다.

후보가 된 뒤에도 그의 운은 계속됐다. 그를 공격하고 검증하자고 덤빌 범여권의 후보가 결정되지 못했기에 대선은 그의 독무대였다. 1997년과 2002년의 대선에서 아들 병역문제로 ‘억울하게(?)’ 패배했다’고 여기는 이회창씨로서는 억장이 무너졌을 법하다. 자기보다 훨씬 도덕성에서 문제가 있어 보이는 이명박이 거의 대통령이 될 것 같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이회창 무소속 후보의 출마조차 이명박 후보에게 악재로 작용하지 않는 듯하다. 50%대 지지율이 40%대로 떨어지기는 했지만, 대선구도가 보수의 우위로 고착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이회창의 합산 지지율이 60%를 넘으면서 진보가 얻을 수 있는 최대의 표가 40%도 채 안 되는 국면이 돼버린 것이다. 이회창씨의 출마가 국민의 관심을 끄는 바람에 범여권의 후보 단일화도 시선을 끄는 데 실패했다.

더구나 이회창이 스스로 가장 오른쪽에 자리매김을 하면서 이명박은 저절로 중도우파가 됐다. 중도 성향의 표를 잠식해야 하는 정동영 후보로서는 공략 대상이 사라진 형국이다. 정 후보로서는 이회창씨의 출마가 기회에서 위기로 바뀐 셈이다. BBK 의혹의 핵심 인물 김경준씨의 송환 시점조차 이명박에게 호재로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자녀를 자신 소유의 빌딩관리회사에 위장취업시켜 탈세하려 했다는 의혹에 대한 비난여론이 희석되는 희한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는 이명박 후보에게 운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운이 30일 앞으로 다가온 대선까지 계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BBK 수사도 이제 시작일 뿐이다. 더구나 지금까지 제기됐던 의혹이나 악재는 운이 좋아 넘어가기는 했지만, 다시 제기될 것이다. 설령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해도 의혹이 풀리지 않는 한 그의 뒷다리를 잡을 것이다. 그의 운이 국민의 불운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김두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