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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보다 리더십이 더 아쉬웠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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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 10면

한국은 IMF의 긴급 자금 지원을 받아 외환위기의 급한 불을껐다. 사진은 98년 1월12일 청와대를 방문한 미셀 캉드쉬 IMF총재와 김영삼 대통령. 중앙포토

외환위기가 코앞까지 닥쳐온 1997년 11월 14일. 국제사회와 언론의 시선은 하루 종일 국회 재정경제위원회로 쏠렸다. 전날 소위원회에서 가결된 금융개혁 관련 법안 통과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위기 부른 정치상황 … 남긴 교훈

법안이 국회에 넘어온 지 80여 일 만이었다. 이날 재경위는 정회와 속개를 반복했다. 처음엔 신한국당 의원들이 대거 불참해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했다. 신한국당은 일주일 전 김영삼(YS) 대통령이 탈당하기 전만 해도 엄연한 집권 여당이었다. 회의가 속개됐으나 이번엔 야당이었던 국민회의와 자민련 의원들이 떠났다. 회의는 17일로 미뤄졌다.

당시 위기의 징후는 확연했다. 국제금융계는 우리 금융기관의 신용한도를 줄이고 한국에서 투자금을 빼내가고 있었다. 더구나 만기 연장까지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큰 이유는 ‘불신’이었다. 대기업들은 줄줄이 쓰러지고, 금융기관들의 부실은 눈덩이처럼 쌓여가는데도 한국 경제는 근본적인 수술을 하지 않고 있었다.

국제 사회에선 한국 사회를 ‘말은 많은데 행동은 없다(Many Talks, No Action)’며 비아냥댔다.
금융개혁 관련 법안은 한국 정부가 문제를 알고 있고, 해결할 의지와 능력이 있다는 ‘징표’로 국제 사회에 제시한 것이었다. 핵심은 금융 대수술을 위한 통합 금융감독기구 설립이었다. 그러나 한국은행과 개별 감독기관 노조 등은 한사코 이에 반대했다.

11월 17일. 강경식 경제부총리는 아침 일찍 국민회의 조세형 총재권한대행을 찾아갔다. 국민회의 당사 현관과 복도엔 한은 노조원들이 늘어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강 부총리는 국민회의 측에 금융개혁 법안 통과 협조를 호소했다. 반대하더라도 회의에 참석해서 반대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원길 정책위의장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것일 뿐 물리적 저지는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국민회의 측 입장은 회의에 참석해 금융개혁법 처리를 방조했다는 비난을 뒤집어쓰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외형적으로 법안 처리는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법안 처리에 긍정적이던 신한국당 등이 다수였고, 회의에 참석해 처리하면 될 문제였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신한국당은 그해 초 노동법을 단독 처리했다가 여론의 쓰라린 역풍을 맞은 경험이 있었다. 신한국당은 ‘야당이 불참한 상태에서는 단독 처리하지 않겠다’며 발을 뺐다. 금융개혁 법안을 단독으로 처리했다는 부담을 떠안지 않겠다는 얄팍한 계산이었다.

결국 재경위는 18일 여야 합의로 금융개혁법안 처리를 유보했다. 그 무렵 정치권의 절대 관심은 ‘표’였다. 30여 일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에서 표를 얻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법안이나 정책은 뒷전으로 밀렸다.

그때 ‘한국호(號)의 선장’이었던 현직 대통령 YS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당시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은 “금융개혁 법안과 관련해 김대중(DJ) 국민회의 총재에게 협조 요청을 해달라”고 YS에게 여러 차례 건의했었다. 그러나 YS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김인호씨는 “그때 김 대통령이 확신을 갖고 DJ에게 금융개혁 법안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면 당시 정치 상황에서 그가 결코 거절할 수 없을 것으로 봤다”고 말했다.

YS는 훗날 김씨에게 “김 수석은 정치를 안 해봐서 모른데이. 선거 때가 되면 정치인 눈에는 표밖에 안 보인데이. 그때 노조가 그래쌓고 하는데 내가 전화한다고 김대중이 듣나”고 자신이 DJ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은 이유를 밝혔다. 그때 YS가 협조 요청을 했다면 DJ가 어떻게 했을지는 알 도리가 없다. 분명한 것은 그때 여야 정치권의 주된 관심은 대선에 쏠려 있었고, 대통령은 그런 정치권을 설득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그 무렵 국제통화기금(IMF)의 자금지원 약속을 받아놓고 있었고, 금융개혁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금융산업 구조조정 방안과 함께 'IMF행'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구상은 완전히 헝클어지고 말았다. 법안 통과가 무산된 다음날인 19일 강 부총리와 김 수석은 경질됐다. 경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한국 정부는 21일 절박한 심정으로 IMF에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그때 금융개혁 법안이 통과됐다고 해서 가혹했던 외환위기가 닥치지 않았을지는 모를 일이다. 외국 자본들의 ‘탈(脫)한국’ 현상이 과연 조기에 진정됐을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신뢰가 그토록 곤두박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제사회는 위기에 직면한 한국 사회의 ‘리더십 부재(不在)’를 생생히 목격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97년 한국 사회는 어느 때보다 리더십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 리더십은 필요한 순간에 발휘되지 않았다. 금융개혁이 그랬듯이 부실 대기업 정리도 한국의 구조조정 의지와 역량을 보여줄 수 있는 대표적 사례였다. 여러 금융기관들과 얽혀있고 수많은 종업원을 거느린 부실 대기업을 시장경제 원리대로 처리하는 것은 강력한 리더십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해 1월 한보철강 부도 파문 끝에 아들이 구속되는 비극을 겪은 대통령 YS는 임기 말년의 레임덕까지 겹쳐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4월 진로가 쓰러졌을 때도, 7월 기아 사태가 터졌을 때도 YS는 경제팀에 “부도 내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기아 처리를 놓고선 정치권도 기아를 거들었다. 결국 부실기업 정리는 질질 늘어졌고, 금융은 점점 곪아갔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는 일이 되듯, 위기는 한국 경제 전체로 확산되고 말았다.

사실 그해 11월 말 한국 경제를 덮친 외환위기의 표면적 이유는 달러 부족이었다. 그러나 그때 한국 사회에 정작 부족했던 것은 리더십이었다. 리더십의 실종이 외환 금고를 바닥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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