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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비서실>195.전두환,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 사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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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88년 4월13일,대통령직을 물러난지 한달여.공직을 떠난 홀가분한 마음으로 미국여행을 다녀온지 사흘뒤 전두환(全斗煥)前대통령이 서둘러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연희동 자택으로 불렀다.
『못난 동생 때문에 바쁜 사람들을 이렇게 만나자고 해 미안합니다.』 기자들 앞에 나타난 그의 첫마디는「못난 동생」,즉 보름전에 구속된 전경환(全敬煥)前새마을운동본부중앙회장을 대신한 사과의 말이었다.그리고 그는『집안 동생 하나 단속못한 것은 전적으로 나의 불민함과 부덕 때문』이라며『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등 일체의 공직을 사퇴한다』고 밝혔다.
회견 내용상 그가 공직을 떠난 것은 동생의 잘못에 대한 형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다.그러나 회견까지 이른 막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동생의 일에 대한 책임을 절감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동생의 죄상은 일찍부터 들었기에 짐작이 가능한 일이기도했다.재임 당시부터 그는 동생의 비리 문제에 유난히 민감해 무슨 보고만 받으면 당장 그자리에서 확인하곤 했다 .
全대통령 임기중 동생 전경환회장이 한창 새마을운동 관계 업무에 바쁘던 시절,다시말해 새마을운동본부 관련 비리가 시중에 퍼지기 시작하던 80년대 중반 무렵.당시 청와대 1급 비서관이던박철언(朴哲彦)씨가 全회장과 관련된 비리 소문을 몇가지 확인해「용감하게」대통령에게 보고했다.보고를 듣던 全대통령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이내『당장 전경환이 오라고 해』라고 소환령을 내렸다.마침 근처에 와 있었던 듯 全회장이 얼마 지나지않아 도착했다.당장 대통령 면전에서 대질신문이 벌어졌다.물론 全회장은 시종일관 부인이었다.
全대통령은 동생이 멀리 있을 경우는 직접 전화통을 붙잡고 통화해가면서 비리 보고내용을 일일이 확인하는 전화대질신문을 벌였으며,「외제차를 타고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는 청와대 동쪽 끝에서 1백여m 떨어진 팔판동 동생집을 불시에 찾아가 직접 차고문을 열어보는 현장확인을 벌이기도 했다.
외제차는 헛소문이었지만 상당부분의 보고가 사실로 밝혀지면서 全대통령은 동생을 새마을본부 회장직에서 물러나게하고 미국에 유학토록 했으며,나중에는 명예회장직까지 내놓게 했다.그래도 안심이 되지않아 全대통령은 6.29선언으로 대통령직선 제가 불가피해진 직후인 87년 7월 감사원을 시켜 새마을본부에 대한 감사를 하게 한 뒤 그 결과 드러난 문제를 미리 자신의 임기중 시정하도록 배려하기도 했다.그렇게 걱정하고,또 그만큼 단단히 잡도리까지 했지만 결국 퇴임 한달여만에 동생 문제로 발목을 잡힌것이다. 하지만 새마을본부 관련 비리가 신문지면을 도배하다시피하던 때까지도 全前대통령은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이라는 공직을 버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원로자문회의 의장 자리에 대한 그의 애착은 대단했다.애착은 곧 그가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했던「최초의 평화적 정권이양을 이룬 대통령」이라는 자부심이기도 했다.
가까이서 全前대통령을 지켜봐온 Z씨는「대통령의 자부심」에 대해『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예사 자리가 아니잖아요.처음 1년 정도는 자기도 모르게 정신없이 지나가죠.그렇지만 2년째만 돼도 벌써 자신감이 붙어요.많은 정보를 듣고 판단하고 지 시하다 보면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자만에 빠질 수가 있지요.全대통령의 경우 대통령을 7년 넘게 했으니 자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나라가 잘못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없을 수 없죠』라고 설명했다.
어느 대통령이나 그렇지만 특히 全대통령은 최초로 평화적 정권이양을 한 대통령으로서 사실상 자신의 후계자인 후임 대통령에게자문할 자격을 충분히 갖췄다고 스스로 생각했음직하다.
그래서 全대통령은 대통령 자리를 물러나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간 퇴임 첫날 방문객들과 차를 함께 하면서『나는 국정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것이 아닙니다.원로회의 의장으로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고 뒤에서 돌봐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고「책임감」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全前대통령 자신,또는 그 측근의 생각이었다.원로회의 의장직에 대한 6共측의 위기감은 全대통령이 전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6공 청와대 관계자였던 Q씨는『6공 초「대통령 임기가 왜 어중간하게 5년 단임이냐」는 주위의 질문에 영부인이 된 김옥숙(金玉淑)여사가「全대통령이 후임 대통령에게 대권을 넘겼다가 다시찾아갈 생각에서 임기를 줄이고 단임으로 만들게 했다」고 설명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6공 핵심들은 全前대통령이 높다란 뒷마당(국가원로자문회의는 청와대 동북쪽 언덕 위인 남북대화사무국에 자리잡을 예정이었다)에 앉아 이리저리 간섭하려 들 것이라고 우려했죠』라고 기억했다.
이는 당시 6공 사람들,특히 盧대통령 주변 핵심측근들이「국가원로자문회의 전두환의장」이라는 존재에 대해 느꼈던 위압감을 잘말해주는 부분이다.더욱이 원로회의 의장실 집기를 대통령 집무실이상으로 갖춰놓고,장관급 비서실장에 대통령 전 용시설까지 이용할 수 있도록 시행령을 만들어둔 5공의 태도에『상왕(上王)노릇을 하려 든다』는 식의 불쾌감이 팽배했음은 당연했을 수도 있다.일부 측근들 사이에서는『권력을 이양했으면 깨끗이 이양해야지』라는 반감까지 일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생리상 6공 세력이 上王의 무장해제를 도모한 것은 당연했다고 볼 수도 있다.이때 6공측 의도를 결정적으로 뒷받침한 것은 여론,구체적으로 말해 언론의 비판적 보도였다.
퇴임한 全前대통령이 제주도行등 관광과 골프를 즐기던 88년3월6일 某조간신문이 1면에「원로자문회의 비대(肥大)기구로 발족」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2면의 해설기사는 원로회의를「행정부내의 상원」「위헌적 요소」운운하며 강하게 비판 했고 비슷한논조의 보도가 다른 언론매체로 확산됐다.진노한 全前대통령은 즉각「6공의 언론플레이」라는 암수(暗手)로 규정하고 자신의 마지막 비서실장이었던 김윤환(金潤煥)정무장관을 불러 호통을 쳤으나6공측에서는 악의적 언론플레이가 아 니라「전비(前非)에 따른 자연스런 여론」임을 내세우며 맞섰다.
사실 5공측의 주장처럼 발단은 언론플레이였다.당시 사정에 정통한 W씨는『처음에는 시행령 개정과 관련된 최병렬(崔秉烈)정무수석.김용갑(金容甲)총무처장관.현홍주(玄鴻柱)법제처장 등이 의심을 받았죠.당시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한참이 지난 뒤 盧대통령의 다른 핵심측근이 조간신문 청와대 출입기자에게 귀띔해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이같은 언론플레이가 성공했던 것은 反5공의 여론이 광범하게 깔려있었기 때문임은 물론이다.언론플레이는 6공 핵심들이 말하는「고름짜내기」였던 셈이다.
문제가 터지자 총대를 메고 나선 사람은 마침 주무장관이었던 김용갑총무처장관.金장관은 6공 초대 총무처장관으로 내정된 뒤 사전 업무보고를 받는 과정에서 원로회의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이미 두차례에 걸쳐 원로회의의 기구를 축소하고 全前 대통령의 양해까지 얻었던 터였다.원로회의 사무처 직원을 1백여명에서 80명으로,다시 48명으로 축소하고 장관급 자리도 하나로 줄였다.
두차례 줄인 안(案)마저 여론의 도마위에 오르자 金장관은 재차기구축소를 천명하고 全前대통령의 양해 을 받고자 했으나 全前대통령은 면담을 거부해버렸다.
***출입기자에 귀띔 金장관은 육사 동기생인 안현태(安賢泰)前경호실장에게『내가 각하(全前대통령)를 위해 알아서 하겠다』고일방통고하고는 사무처 직원수를 9명 더 줄이고 차관급 자리를 하나 더 없애겠다는 발표를 했다.
문제는「자리를 얼마나 줄였는가」가 아니라 한바탕 여론의 질타를 거치면서 원로회의라는 기구가「무리한 권력욕의 상징」처럼 낙인찍혔다는 사실이었다.6공측은 여론의 흐름에 불을 지르는 언론플레이로 상왕부(上王府)의 사실상 무력화라는 소기 의 성과를 거둔 셈이었다.
6공측은 그러나「사실상 무력화」에 만족하지 않았다.전경환사건이 터지자「명실상부한 무장해제」,즉 全前대통령의 원로회의 의장직 사퇴를 도모하고 나섰다.
6공측이 미국을 방문중이던 全前대통령에게 보낸 첫번째 특사는全前대통령이 가장 어려워하는 사돈이었던 박태준(朴泰俊)당시 포철(浦鐵)회장.전경환회장의 비리에 관한 상세한 조사결과를 쥔 朴회장은 일본에서 서둘러 미국으로 달려가 가까스 로 全前대통령이 귀국하는 비행기에 동승할 수 있었다.朴회장은 6공의 뜻인「對국민사과문 발표」를 요청했다.마지못해 全前대통령은 예정에 없던 공항회견을 갖고 사과했다.
그러나 다음날인 4월11일 6공측은 5공 창구인 메신저 김윤환(金潤煥)정무장관과 이원조(李源祚)의원을 연희동으로 잇따라 보내「사태 조기수습과 총선 승리를 위한 용퇴」를 거듭 요청했다.全前대통령은 하룻밤을 고민한 뒤 받아들이기로 결 심했다.그 결과가 바로 13일의 기자회견이었던 것이다.
全前대통령은 당시 의장직 사퇴를 반대하는 측근들에게『괜찮다』며 오히려 위로했다고 한다.엄밀한 의미에서 파워게임에서 패배한것이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총선승리」라는 공존공영의 터전마련을 위한 동지애로 해석될 수 있었던 것이다 .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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