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경수로 北 묵시적 수용-북미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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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주일째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던 北-美 3단계 고위급 2차회담은 회담 종료일로 잡혀있던 29일 양측이 극적으로 회담 연장에 합의함으로써 일단 결렬위기를 모면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회담 연장에 북한이 적극적으로 나온 사실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북한이 적어도 그동안의 강경 입장에서 한발 물러나 어느정도 양보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시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양측은 지난달 12일 합의한▲건설중인 흑연감속로 동결과 경수로 지원▲관계정상화▲한반도 비핵화선언 이행▲북한의 핵안전협정 이행등 4개항을 실현한다는 원칙에는 이견이 없었다.
양측은 그러나 이같은 합의사항을 이행하는 순서,즉 이행 사항의 순차성(順次性)에서 팽팽한 평행선을 그어왔다.
특별사찰 실시 시기에 대해 북한은 경수로가 완공되는 8~10년후에 받겠다고 고집한 반면 미국은 경수로 건설계약이 체결되고자재가 본격적으로 북한에 반입되기 전까지는 성사돼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영변(寧邊)의 5㎿급 실험용 원자로에 대해서도 북한은 지역난방과 실험연구를 위해 핵연료 재장전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데 반해 미국은 재장전하지 않는다는 것이 협상의 토대라고 맞섰다.
폐연료봉 처리문제에 대해 북한은 주권론을 거론하며 국내에 그대로 둔채 건식 보관하겠다고 고집한 반면 미국은 핵투명성을 영구적으로 보장하겠다면 제3국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양측은 그동안 수석회담과 실무회담으로 이어진 숨가쁜 협상에도불구하고 핵심 쟁점에 대한 이같은 의견대립으로 내용상으로는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미국은 이에 따라 29일 예정대로 협상단을 철수시키고 다음달중순까지 냉각기간을 가질 방침이었으나 이날 북한측이 회담 연장을 제의해옴에 따라 수석대표회담만 며칠 쉬는 것으로 하고 회담을 계속하게 된 것이다.
이번 회담에서 양측은 각각의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상대방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짚어보며 타협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했던 것도 사실이다.
경수로 지원과 관련,베를린 전문가회의 때까지도 한국형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던 북한의 입장은 이번 회담에서 상당히 완화됐다. 북한은「한국형」또는「한국이 주도하는」등의 표현을 삭제하는 조건으로 재정적.기술적 문제에서 한국형 밖에 대안이 없다는 미국의 설득을 묵시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회담이 장기전에 돌입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낙관적인 결과가 나올 것으로 단언하기는 힘들다.북한핵 협상은 모든 현안을 포괄적이고 광범위하게 타결해야 한다는 원칙아래 출발하고 있어 어느 하나라도 이견이 생길 경우 전체가 무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네바=高大勳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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