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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바둑칼럼>관철동 시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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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김인(金寅)의 시대는 갔지만 지금도 많은 올드팬들은 金寅9단을 잊지 못한다.
金寅은 명동시절의 마지막해인 65년 난공불락의 조남철(趙南哲)9단으로부터 국수(國手)위를 쟁취했고 관철동시절의 중반쯤인 76년 그의 마지막 타이틀 패왕(覇王)을 잃었다.사람들은 그래도 金寅은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으나 그는 다 시 돌아오지못했다. 차륜의 승부세계에서도 발군이라할 조훈현(曺薰鉉)의 등장은 「영원한 국수」라 불린 金寅을 영영 쓰러뜨린 것이다.그는한국기원의 관철동시대에,그러니까 풍류와 허구가 섞인 승부세계가치열하고 비정한 세계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꽈당 쓰러진 바둑계의거목이었고 향기있는 꽃이었다.
43년 전남 강진의 바닷가에서 태어난 金寅은 씨름선수에 헤엄잘치고 바둑 잘두는 조금은 독특한 시골소년이었다.13세때 바둑판을 안고 야간열차로 혼자 서울에 와 15세에 프로가 됐다.곧일본유학을 떠나 기타니(木谷)도장의 사범이 되 어「기재(棋才)는 탁월했으나 여자애들을 때리고 잘 울리던 말썽쟁이」조치훈(趙治勳)을 지도하기도 했다.당시 일본에선 金竹林시대의 도래가 공공연히 점쳐지고 있었다.金寅.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린하이펑(林海峯) 이 3인이 바둑계를 지배 한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한국바둑을 키우는데 더 애착을 느꼈던 金寅은 스승 기타니9단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했고 그후 그는 국수 6연패,왕위(王位)7연패,패왕 7연패등 전기전을 휩쓸어버린다.
이목이 수려하고 기품이 깊이 배인 金寅의 대국태도는 곧 팬들을 매료시켰다.
산처럼 중후한 기풍을 지녔으나 평소엔 소박했고 도연명을 좋아하고 구식을 고집하며 유유자적했다.金寅의 주위엔 많은 친구들이모여들었다.그는 상금과 대국료를 풀어 가난했던 동료들에게 예사로 술잔치를 벌였다.그래서 金寅 역시 가난을 벗 어나지는 못했다. 백남(白南)배라는 타이틀전은 金寅이 타이틀을 잃자마자 곧없어져 버렸다.대회의 스폰서였던 모대학 이사장 K씨가 오직 金寅만을 위해 만들었던 기전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바둑의 승부가 비정하고 가혹해졌다고 하지만,술이나 시나 철학등은 승부에 해악이 될뿐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바둑의 본질에 맞지 않는 것이다.기계처럼 단련하고 세상사를 잊어버린채승부에 임해서는 전력을 기울여 승리만을 추구해 이겨지는게 바둑이라면 그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바둑의 기술자와 바둑의고수는 다른 것이다.』 金寅은 전성기에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그는 엄밀히 말할때 허구를 좇는 병법가였고 바둑이 지녔던 도(道)의 가치를 고수하려는 이상주의자였고 결과보다 과정을 더중시하는 「장이」였다.TV바둑이 바둑의 본질에 어긋난다고 고집스레 참 가하지 않던 金寅,그는 어떤 의미에서 현대적 프로와는거리가 먼 낭만주의자였던 것이다.프로는 이기면 스타고 지면 잊혀지는 팬의 우상이자,휴지조각일수 있다.그래도 金寅9단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스타다.후배들도 그를 특 별히존중한다.
영원한 국수 金寅,관철동사람들은 그를 변치않는 청산(靑山)이라고도 부른다.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제자리에 제모습을 드러내는 푸른 산(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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