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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병과 F코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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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1980년대 말 미국이다. 한 정신과 진료실에서 의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다. 한국인 환자가 찾아왔는데 도무지 병명을 알지 못하겠던 거다. “가슴이 답답하고 때론 아프고 쓰리기도 하며 속에서 불덩이가 치솟는 것 같기도 하고 온몸에 열이 나는 듯한 느낌”이라는데 내과에 가봤더니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더란다. 미국인 의사는 끝내 두 손 들고 말았고 한국인 환자는 더욱 먹먹해진 가슴을 부여잡고 병원 문을 나서야 했다.

하지만 같은 증상의 환자가 거듭되면서 92년 처음으로 미 의학계에 보고됐고 96년에는 미 정신과협회 진단기준에 정신질환의 일종으로 공식 등재됐다. 그 병의 이름이 ‘화병(火病)’이다. 영어로도 우리 발음 그대로 ‘Hwabyung’이라고 쓰는데 유독 한국인에게서만 증세가 나타나기 때문이란다. 미 정신과 진단기준에도 ‘한국인에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으로 불안·우울증·신체이상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분노증후군’이라 규정돼 있다고 한다.

이거 참, 이웃 일본에도 중국에도 없는 병이 어찌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말인가. 억울하기 짝이 없는데 한편으론 또 고개가 끄덕여진다. 따져 보면 그럴 법도 하단 얘기다.

화병은 화는 나는데 화풀이를 못 해서 생기는 병이다. 그래서 온순하고 양심적이며 책임감 강하고 감정을 잘 다스리는 내성적 사람들에게 발생하기 쉽다고 한다. 과거 화병 환자의 80%가 여성이었던 것도 그래서다. 오랜 세월 가부장적 마초(macho) 사회와 가정에서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으로 살아왔으니 어찌 안 그렇겠나. 그런데 요즘은 남성 환자가 크게 늘고 있단다. 나날이 열악해지는 근무 여건 속에서 윗사람에 치이고 아랫사람에 받치는 고통을 남에게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서 끙끙 삭히니 속이 시커멓게 탈 수밖에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입시지옥에 빠져 이 학원 저 학원 뛰어다녀야 하는 아이들도 안전지대에 있지 않다. 그렇잖아도 속이 끓는데 정치인·공직자들까지 이런 꼼수 저런 거짓말로 열 받게 만드니 한국인들이 화병에 걸리게도 생겼다.

자초하는 측면도 없잖다.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스트레스가 없겠나. 안에서 생긴 스트레스는 밖에서 풀어야 하는데 운전을 하면서도 앞차를 앞질러야 하고 친구들과 운동을 하면서도 지고는 못 사니 이처럼 유별난 승부욕 속에서 화병이 안 생기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인 거다.

화병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는 공통적으로 오랫동안 억눌려온 억울함과 분노·체념·적개심·열등감 등을 표현한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를 전문가에게 충분히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치유 효과를 보기도 한단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지구상에서 정신과 상담이 가장 필요한 나라가 우리나라라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 그것이 마치 전과 기록처럼 남아 원활한 사회생활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고 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본지 11월 8일자 11면). 정신과 진료를 받아 ‘정신행동장애’로 판명되면 ‘F코드’로 낙인 찍혀 보험 가입이나 취업 등에 불이익을 겪을 수 있다는 거다. 요즘 아이들에게 적지 않은 과잉행동장애(ADHD)는 말할 것도 없고 불면증, 신경성 두통, 소아들의 야뇨증도 모두 F코드로 분류된다. 새 직장에 적응을 잘 못 해도(적응장애), 많은 사람 앞에 나설 때 말이 떨려도(불안장애) 모두 F코드다.

전문의와 상담 몇 번이면 나을 수 있는 이런 증상들을 전과 기록(?)이 남을까 두려워 감추고 병을 키워서야 말이 되겠나. 적어도 언제 터질지 모를 화병 인자를 안고 사는 우리들끼리는 그러면 안 된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주기적으로 전문의 상담을 받는 게 독감 예방주사 맞는 것처럼 여겨지는 풍토가 돼야 한다. 그래야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사회가 된다. 그렇지 못하고 화병을 감추고 키워온 게 우리네 ‘한(恨)’ 아니었던가.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