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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식민지 지식인의 뒷모습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5호 02면

1929년 우리나라 최초로 ‘예술사진 개인 전람회’를 연 무허 정해창 선생의 자화상.

맨 처음 길을 내는 일은 두렵고도 어렵습니다. 무허 정해창(1907~67) 선생이 걸어간 삶도 그러했으리라 짐작합니다. 배우개(현 종로 4가)에서 원제(元劑) 약방을 운영하던 중인계급의 아들로 태어나 열다섯에 일본으로 유학 간 그는 우리가 흔히 선구자라 부르는 몹시 독특한 일생을 보냈습니다.

순화동 편지

선생을 다시 생각하게 된 건 일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벽(癖)의 예찬, 근대인 정해창을 말하다’전(2008년 2월 3일까지·02-2020-2055) 덕입니다. 1929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예술사진 개인 전람회’를 연 이로만 기억되던 그가 얼마나 다채로운 얼굴을 지닌 근대 지식인이었는가를 깨우치게 됐죠.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시선으로 주체적 삶을 꾸렸던 한 인문주의자의 일생이 2개 층 전시장에 펼쳐져 있습니다.

선생은 우선 전통의 정신과 서구의 기계미학을 조화시킨 사진가였습니다. 2층 전시실 벽면에 빼곡한 500여 점의 흑백 사진을 좇아가면 전래 문인화를 보는 듯 맑고 고졸한 멋이 흘러넘칩니다. 사진기가 그의 붓이었던 셈이죠.

사진가로 활동할 때 쓴 무허(舞虛)라는 호의 뜻처럼 그는 식민지가 된 허무한 이 땅에서 한판 춤을 추듯 옛 미감을 끌어내려 그림 같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한 폭의 산수화 같은 풍경, 화조화처럼 보이는 꽃과 새 그림, 조선시대 신윤복의 ‘미인도’에서 튀어나온 듯한 여성 인물 사진은 단순한 취미 벽(癖)으로만 볼 수 없는 면모를 보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반가웠던 전시품은 5권으로 이뤄진 불교미술 사진첩입니다. 53~57년 사이에 전국을 답사하며 촬영한 2483점의 불교미술 관련 사진을 꼼꼼하게 정리한 누런 스크랩북은 그동안 사라져버린 근대 유적을 연구할 수 있는 기초 자료로 손색이 없어 보였습니다.

1층으로 내려가니 서예가이자 전각가·금석학자이자 장서가로서의 다채로운 얼굴이 이어집니다. 선생은 서예가일 때는 자신의 이름인 해(海)를 파자해 수모인(水母人)이라는 호를, 전각가로서는 물아재(物我齋)를 써 팔방미인다운 재주를 자랑했습니다. 그가 배우고 교유한 위창 오세창(1864~1953)과 성재 김태석(1874~1953) 등 모임의 면면을 보면 역시 ‘노는 물이 달랐구나’라는 부러운 마음이 듭니다.

이 시기, 한국의 풍물과 풍속을 담은 사진은 대부분 일제가 식민 통치를 위해 찍은 것들이라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두드러집니다. 그에 비해 정해창 선생의 사진은 한눈에 봐도 우리가 찍은 우리 기록물이라는 느낌이 옵니다. 재미있는 점은 선생이 주로 뒷모습을 찍었다는 사실인데요.

휘적휘적 걷거나 고즈넉하게 서 있는 조선 사람은 모두 돌아서서 뒤만 보여줄 뿐입니다. 식민지 지식인의 시대 자각이 이런 표현으로 나왔을까 짐작할 뿐입니다. 이 전시는 정해창의 탄생 100년을 기려 ‘사진아카이브연구소(연구원 이경민)’가 기획해 꾸렸다는데요. <관계기사 16~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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