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기다리는 생명체 지하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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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 18면

대도시는 살아있다
지구가 살아있다는 말은 나무든 흙이든 모든 구성 요소들이 서로 관계 맺으며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도시가 살아있다면 그건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대도시는 진정 살아있다. 대도시 거주자들은 모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을, 셀 수 없이 여러 번 만나고 또 헤어진다. 들끓는 이들 관계의 네트워크는 벌집 속의 수많은 벌처럼 그야말로 카오스다. 더욱이 이들은 호모파베르 시절부터 지금껏 가지가지 테크놀로지를 동원해서 그 비등점을 낮췄다. 이제 테크노컬처와의 친화력은 대단하다. 지하철은 살아있는 대도시의 이런 친화력 한쪽을 차지한다.

지하철 다시 보기 <6>

카오스의 가장자리에서
지하철역사의 통로를 가다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빼곡하게 들어선 사람들이 거의 부딪치지도 않으면서 양쪽 방향으로 잘도 오간다. 그걸 보면 카오스 세계의 거주자인 우리도 일정한 패턴과 질서 속에서 살고 있는 듯하다. 게다가 지하철 노선도는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게 분명한데도, 사람들은 거기서 갑자기 토끼나 코끼리의 형상을 본다. 재미나다.

그러나 이것은 수많은 구성 요소들의 관계를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을 때만 가능하지 않은가? 작가 이혜승과 필자의 호기심도 그런 것이었고 또 고민도 거기 있었다. 지하철은 대도시의 수많은 구성 체계들과 서로 관계 맺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기란 쉽지 않다. 우리의 눈이 늘 땅에 붙어 있어 그 높이에서만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땅의 눈높이에서 탐사하고, 이에 더해 저 높이 새의 눈으로 내려다보아야 했다. 이혜승의 작업은 그 결과다.

다시 한 번 더 새의 눈으로
이번 지하철 작업은 지하철에 대한 이혜승의 발견적 경험을 토대로 지하철의 구성 요소들 간의 관계를 분해하고 다시 새의 눈으로 재해석해냈다. 이혜승의 작업은 대개 중성적이거나 진한 톤의 색상을 즐겨 사용해서 대상을 모호함 속에 몰아넣은 뒤 다시 평면적인 형태들로 재조직해낸다. 이것이 우리에게 낯설고도 야릇한 대상의 질서를 던져 준다.

작품 ‘입구, 한성대’와 ‘통로, 왕십리’는 지하철의 막과 소통을 문제 삼는다. 시스템으로서 지하철은 열려진 구멍을 통해 외부와 소통할 것이다. 그런데 지구별에서 가장 효과적인 막을 지닌 것은 생명체다. 이것의 막은 모순성을 동시에 성취한다. 개체로서 존립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막의 폐쇄성이며, 그 개체의 존립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개방성이다. 그래서 유기적 시스템은 이 양극성을 충족시키면서 적응하고 또 진화한다.

지하철을 애용하는 우리는 하루만큼이나 평범하다. 그런 우리에게 지하철은 비좁은 입구와 통로이고, 끝이 보이지 않는 가파른 계단이며, 무섭게 달려올 낯선 쇳덩어리에 대한 소심한 기다림일 뿐이다(‘기다림, 환승장’). 살맛 나는 의미들이 달라붙기에는 너무나 어둡고 습하다. 테크노컬처의 친화력에 비하면 이것은 지나친 소외감이다. 유동적이며 자유로운 소통을 이끌어낼 만큼 지하철 시스템은 열려있지 못한 듯하다. 그래서 지하철의 야박한 개방성만큼이나 노인과 장애인에게 그것은 시큰둥하게 보인다.

지하철이 경직된 시스템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마도 지하철의 자기 참조성 때문일까? 아니면 오랜 기간 동안 행해진 근친교배 때문일까? 필자의 경험상 지방 대도시의 지하철은 서울의 지하철을 닮는다. 우리 지하철은 일본 도쿄의 지하철과 너무 비슷하다. 그럼 일본 지하철은 어떤가? 이런 식으로 보니 런던의 지하철은 세상 모든 지하철의 어머니, 즉 모든 벌의 유전자를 나눠준 여왕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지하철이 유연한 적응력을 가진 시스템이길 원한다면, 런던과 서울의 거리만큼이나 다른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닮아서 고마운 것이 아니라 서로 달라야 고마운 것이다. 이것이 안 된다면 많은 이들의 시큰둥함은 사라질 수 없을지 모른다.

희망을 참조할 것
대양의 고래가 숨을 쉬기 위해 잠시 물위로 머리를 내밀 듯, 지하철 차량이 고되게 일하다 잠시 볕을 먹으러 땅 위로 올라올 때가 있다(‘태양 아래 중앙선’).
서울 복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다리를 건너는 경우를 제외하고 아마도 가장 인상적인 구간은 용산서 청량리까지 한강변을 달리는 노선일 게다. 그 구간에선 지친 대도시를 관통하는 검붉은 한강의 물결이 차창에서 흐르는 빛과 만나 희뿌연 용을 만드는 낭만이 연출된다.

지하철이 대도시의 다른 개체들과 만나는 이 소시민적 감동에서, 어느새 우리는 지하철이 대도시를 구성하는 하나의 개체임을 알게 된다. 지하공간에 존재하지 않던 초록과 강물과 건물과 거리와 땅과 하늘이 갑자기 시야에 들어온다(‘지하철, 한강, 노들섬’).

회화적 상상력은 지하에서 우리 내면에 묶인 갑갑함을 풀어내고 다시 새의 눈으로 지하철을 내려다보게 한다. 이제 대도시는 푸른 강물이 흐르고, 푸른 나무들이 흐르고, 형형색색의 띠들이 흐른다(‘조감 1’, ‘조감 2’, ‘조감 3’). 그리고 거기에 살아있는 소통의 희망을 기다리는 지하철이 있다.


이재준씨는 문화-디지털 테크놀로지-예술현상을 화두로 미술이론·평론을 하는 서울대 의생명지식공학연구실 전임연구원입니다. 이혜승씨는 홍익대와 프랑스 ‘에콜 데 보자르’ 를 나온 뒤 대도시와 자연 간의 연관을 주제로 작업 중인 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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