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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달러 쟁탈전이 빚은 ‘예고된 참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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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 19면

“담수화 설비 분야의 살아있는 역사죠.”

‘해수 담수화 기술 영웅’ STX 사장이 구속된 사연

9일 두산중공업의 영업비밀을 유출한 혐의로 구속된 STX중공업 구모 사장에 대한 업계 관계자의 평이다. 올 4월까지 ‘두산맨’이었던 그는 이 회사가 담수화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이다. 그 때문인지 두산 측 관계자들조차 “어쩌다 이런 일이…”라며 씁쓸해 하는 표정이다.

이번 사태의 이면에는 중공업 분야의 치열한 인력 스카우트 전쟁이 있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한때 반도체 등 IT 분야에 집중되던 기술 유출 논란은 올 들어 조선·중공업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오일 달러와 중국 붐으로 이들 굴뚝 산업이 사상 최대의 호황을 맞으며 생기기 시작한 현상이다. 모두 국내 업체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분야다. 이들 산업은 특히 원천 기술보다는 오랜 경험을 통한 상용화 기술이나 공정기술이 중요하다. 상대적으로 기술 유출의 범위도 애매해 분란의 소지가 크다. 최근 이들 분야의 인력난 속에 스카우트 전쟁이 더욱 가열되고 있어 앞으로 비슷한 사건이 줄을 이을 가능성도 크다.

“영웅이 배신자로”=구 사장은 1981년 두산중공업의 전신인 한국중공업에 입사한 이래 해수 담수화 부문의 국산화를 주도해 왔다. 회사 측의 전폭적인 지원과 그의 노력으로 한국중공업은 95년부터 설계에서 제작·검사·시공·시운전에 이르는 전 공정을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했다. 두산중공업은 현재 담수화 설비와 관련해 단 1%의 로열티도 지출하지 않는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은탑산업훈장을, 2002년에는 세계담수협회 회장상을 받기도 했다.

두산중공업이 한국중공업을 인수한 뒤에도 그는 담수BG(사업부문)장, 2002년 부사장을 거쳐 2004년 기술연구원장을 지냈다. 2005년에는 상임고문으로 일선에서 한 발 물러났다. 일종의 퇴직 전 예우였다. 두산중공업은 고문에게 3년간 급여의 70∼80% 지급, 현직 때와 같은 보험혜택 등을 제공한다.

그를 다시 시장으로 이끈 것은 새롭게 담수화설비 사업에 뛰어든 STX그룹이었다. 고문에서 물러난 지 두 달 만인 6월 STX중공업 산업플랜트 사장으로 전격 영입됐다. 이를 전후해 두산중공업 전·현직 직원들이 연쇄적으로 STX로 자리를 옮겼다. STX중공업에 근무하는 두산중공업 출신들은 임원급부터 실무자까지 20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 사장과 함께 구속된 김모 상무는 두산중공업에서 중동·유럽 지역 수주를 담당했다.

핵심 인력을 확보한 STX중공업은 곧바로 사우디아라비아 대형 프로젝트에 수주 제안서를 내며 시장에 뛰어들었다. 발끈한 두산 측은 구 사장이 퇴직 때 반납한 노트북에서 자료가 유출된 흔적이 발견됐다며 검찰에 진정했다. 검찰은 구속영장을 청구하며 구 사장 등이 두산중공업 퇴직 당시 반납하지 않은 자료 등을 활용해 제안서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STX의 프로젝트 입찰 준비 문서에 두산중공업의 원자료에 있었던 데이터가 그대로 나오는 것은 물론 일부 잘못된 표기까지도 쓰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스카우트 전쟁의 후유증=요즘 스카우트 시장의 관심은 온통 조선·중공업·철강 등 ‘굴뚝 3총사’에 모아진다. 조선 업계에선 인력 이동으로 인한 기술 유출 문제가 일찌감치 문제로 대두됐다. 조선업계 한 관계자는 “업체들이 너도나도 증설에 나서면서 개인 경력에 설계의 ‘설’자만 들어가도 고액 연봉과 승진을 조건으로 모셔가려 하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특히 최근 조선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있는 중국은 강한 흡인력으로 전문 인력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이 관계자는 “중국에 가보면 조선소마다 국내 모 업체 출신들이 핵심 포스트를 맡고 있다”고 전했다.

건설 쪽도 마찬가지다. 아예 팀 단위로 통째로 뽑아가기도 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부하 직원들을 얼마나 데려올 수 있느냐에 따라 처우가 달라지기도 한다”고 전했다.

핵심 기술자료 유출이 없더라도 인력 이동만으로도 업계 판도에는 상당한 파급 효과를 미친다. 최근 메모리 시장의 공급과잉과 대만업체의 공세 강화의 이면에는 2000년대 초반 하이닉스에서 유출된 국내 연구 인력이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기업들은 비상이 걸렸다. 하지만 마땅한 방지책이 없다는 것이 고민이다. 가시적인 조치는 회사 내 보안검색을 강화하고 대량 메일 전송을 금지하는 등의 대책이 고작이다. 국내 최고 수준의 보안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한 업체의 관계자는 “아무리 철저히 한다고 해도 마음먹고 빼먹으려 하면 구멍이 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퇴직 이후 동종 업체 취업 제한 등의 규정도 유명무실하다. 두산중공업도 임원이 퇴직 뒤 3년간 전직을 하지 않는다는 약정을 하도록 하고 있지만 어기더라도 현실적으로 제재할 방법은 없다.

이와 관련해 업계 관계자는 “핵심 인력 관리와 처우에 보다 관심을 쏟는 것이 근본적인 방지책”이라고 밝혔다. 산업자원부 조사에 따르면 그간 적발된 기술 유출자는 대부분 전·현직 직원(85.9%)이었다. 유출 동기는 ‘영리·돈’이 70%에 달했다. 다음으론 인사나 처우에 대한 불만, 신분 불안(26.1%) 등이 단초가 됐다.

‘영업비밀 범위’ 논란 벌일 듯=이번 사건은 해외가 아닌 국내 대기업 간에 벌어진 대규모 기술 유출이다. 영업비밀의 범위를 놓고 법정에서 양측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사전 공방전도 뜨겁다.

구 사장 등의 구속 이후 두산 측은 “이들이 빼돌린 담수화설비 기술은 30년간 쌓아온 노력의 결과물로 그간 쏟아 부은 투자금액과 직원들의 땀방울까지 고려한다면 그 가치를 환산할 수 없을 정도”라고 밝혔다.

반면 STX 측은 “이들은 정당한 절차를 통해 영입됐으며 이들이 보유한 자료도 업무수행 과정에서 작성·보관된 것으로 통상 영업비밀의 보호기간이 대부분 지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휴대전화 설계도면 등과는 달리 플랜트 분야는 각 상황에 맞게 설비형태가 새롭게 설계되고 제작되는 만큼 기존 자료를 그대로 쓸 수 없는 구조”라고 덧붙였다. 해당 자료를 영업비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두산 측은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유출된 기밀 자료가 실제 STX중공업의 사업추진 과정에서 사용됐다는 사실”이라며 “기밀자료가 아니라면 검찰과 법원이 무고한 사람을 구속했겠느냐”고 재반박했다.

담수화설비 어떤 것이기에…

바닷물을 민물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는 바닷물을 끓여서 증류수 형태의 민물을 만드는 증발법(MSF). 두산중공업은 이 기술이 뛰어나다. 세계 시장의 46%를 점유할 정도다. 두산중공업이 이번에 유출됐다고 하는 바로 그 기술이다.

둘째는 정수기 원리로 반투막으로 소금을 걸러내 민물을 만드는 역삼투압방식(RO)이다. 두산중공업은 2005년에 이 기술을 보유한 미국 회사를 아예 인수해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이런 해수담수설비는 주로 물이 부족한 섬에서 바닷물을 생활용수로 쓰기 위해 소규모로 시공돼 왔다. 하지만 중동 국가를 중심으로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 시설이 속속 들어서며 황금알을 낳는 신성장 산업으로 떠올랐다. 1978년부터 이 사업에 진출한 두산중공업은 현재까지 대형 프로젝트 10여 건을 했다. 그런데 최근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만 8건에 달할 정도로 활황세다. 사업 규모도 점점 커져 단일 프로젝트의 발주액이 2조원에 이르기도 한다. 고유가로 오일 달러가 넘쳐나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향후 전망은 더 밝다. 담수화 사업은 지구 온난화와 환경오염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물 부족 현상이 커지면서 대표적인 성장 산업으로 꼽히고 있다. 업계에선 중동은 물론 아프리카·아시아 지역에서만 2010년까지 240억 달러 규모의 시장이 만들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그럼에도 후발 주자들은 선뜻 이 사업에 뛰어들지 못한다. 독특한 진입장벽 탓이다. 현재 담수설비의 설계, 시공, 시운전까지 전 공정을 운용할 수 있는 업체는 세계에서 5개사뿐이다. 이들은 핵심 기술이 공개될 것을 꺼려 특허 등록조차 하지 않고 있다. 영업비밀의 형태로 보유한다. 완공된 플랜트도 외부에 공개되지 않아 이를 역추적해 베끼는 것도 어렵다.

“무엇보다 오랜 경험으로 축적한 노하우가 중요한 산업”이란 게 두산중공업 관계자의 설명이다. 달리 말하면 사업을 단기간 내 궤도에 올리기 위해선 경험 많은 핵심 인력을 확보하는 길밖에 없다. 앞으로도 국내외에서 스카우트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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