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제걷기대회에서 만난 사람, 사람들 ① - 팝 제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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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 한국인 ‘팝 제니’

일본 국제걷기대회가 열린 첫날, 세계 곳곳에서 날아온 그 수많은 ‘걷기 중독자’ 무리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람들이 걷기대회에 이렇게나 열정적으로 참여할 줄 미처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왠지 모를 흥분과 설렘, 그리고 약간의 긴장감으로 참가자들의 면면을 신기한 듯 살피던 중 유독 눈에 띄는 파란 눈과 노란 머리의 여성이 있었다. 그녀를 유심히 보게 된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등 번호판을 보니 그녀가 한국인 자격으로 출전을 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분명 안면이 없는 사이인데도 유난히 낯이 익었다는 점이다. 걸으면서 우정을 나눈다는 걷기대회 정신에 입각해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다행히도 그녀 역시 우정과 배려가 충만한 미소로 응해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환하게 웃는 순간 왜 그토록 어디서 본 듯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바로 외국인 재연배우로 활동 중인 팝 제니(39)였던 것이다. 일본에서, 그것도 걷기대회에서 이렇게도 만날 수 있구나 싶은 것은 와락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다음은 그 반가운 마음으로 그녀와 나눈 대화 몇 토막이다.

WH: 자기를 소개해 달라.

내 이름은 팝 제니, 루마니아 출신이다. 프리랜서로 방송 활동을 하면서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재연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얼굴이 많이 알려지게 됐다. 한국에 오게 된 건 13년 전의 일이다. 루마니아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던 한국 남자와 사랑에 빠졌고, 지금은 두 딸아이를 두고 있다. 한국 국적은 1997년에 취득했으니, 한국인으로 산 지 벌써 10년째다.

WH: 걷기대회에 참가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워크홀릭까지는 아니지만 평소에도 걷는 걸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한국에 와서도 많이 걸어 다녔다. 걷는 동안 주변 환경도 구경하고 사람들 사는 모습도 볼 수 있어서 매우 재밌었다. 그러다가 아주 우연하게 외국인들 친목 모임에서 한국체육진흥회의 윤선출 사무국장을 만나게 됐다. 그는 외국인들을 걷기 모임에 동참시키려고 노력 중이었는데 내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자 제주도에서 열리는 걷기 대회에 초청해주었다.
처음으로 걷기 대회에 참가해 사람들과 제주도를 쭉 걸었는데 단지 걷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함께 걷는 사람들과 우정을 쌓고 자연 환경을 가깝게 접하고 한국인들의 고유한 생활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의 장이었다. 동시에 매우 유쾌한 축제이기도 했다. 그렇게 걷기 대회의 재미를 느끼자 설악산 걷기 대회, 원주 국제걷기대회 등에 계속 참가하게 됐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일본까지 오게 된 거다.
걷기는 정말 즐거운 일이다. 스트레스 없이 여유 있게 자연을 즐기면서 운동도 할 수 있지 않은가.

WH: 당신이 생각하는 걷기의 매력은 무엇인가?

이번 걷기 대회에 와서 새삼 다시 느낀 게 있는데, 각자 사는 나라는 다르지만 여러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걷다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뿌듯한 느낌이 든다. 사람들이 그래서 걷기가 몸의 건강과 마음의 건강에 다 좋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함께 걷다보면 어느 순간 정말 우리는 ‘하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실용적인 면에서도 걷기가 얼마나 간편한 운동인가. 루마니아 여자들은 한국 여자들보다 훨씬 더 일찍 하이힐을 신기 시작한다. 내 친구도 열네 살부터 하이힐을 신었다. 그게 몸에 좋을 리가 없다. 그 친구의 발등은 벌써부터 둥그렇게 휘어버렸다. 나는 무조건 발이 편한 신발은 신는다. 걷기 운동을 좋아하는 이유도 간편한 신발 한 켤레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신발도 좋은 것을 신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나는 아직까지는 신발에 많이 투자하는 편은 아니다. 이번에도 단화를 신고 왔다. 영등포 시장 지나가다가 편해 보여서 직접 신어보고 산 거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시작하기 쉽고 사람들의 일상과 친근한 운동이 걷기인 것 같다. 그게 걷기의 매력이다.

WH: 이번 걷기 대회에서 인상 깊은 점은 무엇이었나.

여기 모인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면 알겠지만 일본·네덜란드·캐나다·독일·스위스․러시아 등 세계 곳곳에서 걷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래서 세계의 다양한 문화행사가 펼쳐졌다. 나도 루마니아 전통의상을 입고 일본의 문화행사에 참석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단지 걷기만 하는 게 아니라 볼거리가 풍성해서 행사 자체가 매우 흥겨웠다. 색다른 퍼포먼스들이 많아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가마를 드는 행사와 각국의 고유한 춤 등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물론 다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걷기를 통해 우정을 쌓는 걸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가 빠르게 걷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천천히 걸으면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새롭게 펼쳐지는 낯선 풍경을 만끽한다. 그런데 그보다는 걷기를 또 하나의 경쟁 혹은 경주로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 것 같더라. 그런 사람들은 주변 경치도 살피지 않고, 사람들과 눈인사도 나누지 않는다. 목표를 향해서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는 걷기는 매력이 없다. 걷기 대회를 통해서 따뜻하고 여유로운 문화를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객원기자 정유진 yjin78@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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