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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겉과 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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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근 재미난 경험을 두 차례 했다. 하나는 미국과, 또 다른 하나는 중국과 연관된 것이다. 소소한 사실을 거창한 명제로 연결하려는 견강부회(牽强附會)에 가까웠으나 혼자만의 상상과 해석은 유쾌했다.

 2주 전 영남지역에 출장을 갔다. 중앙일보와 행정자치부가 공동주최하는 ‘제31회 청백봉사상’ 후보를 현장 확인하는 업무였다. 묵묵히 일하는 청백리들의 사연에 고개가 숙여졌다. 그런데 신경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었다. 현지 실사단을 안내한 도청·시청 공무원의 명함에 새겨진 영문 로고였다. 각 지역의 특색을 단박에 드러내려는 의도는 이해했으나 너 나 할 것 없이 새긴 ‘짧은 영어’는 심각한 강박증처럼 느껴졌다.

 예컨대 처음 들른 경북은 ‘프라이드(Pride) 경북’. 대구는 ‘컬러풀(Colorful) 대구’였다. 부산은 ‘다이내믹(Dynamic) 부산’이요, 경남은 ‘필(Feel) 경남’이었다. 울산은 ‘울산 포 유(for You)’. 지자체마다 영어경진대회를 연 모양새였다.

 서울에 돌아와 다른 시도의 홈페이지를 검색했다. ‘하이(Hi) 서울’을 필두로 ‘잇츠(It’s) 대전’ ‘하트 오브 코리아(Heart of Korea) 충청남도’ ‘플라이(Fly) 인천’ ‘유어 파트너(Your Partner) 광주’를 만났다. 충북·전북·제주는 영문 로고가 없었고, 전남(녹색의 땅 전라남도)만이 유일하게 우리말을 사용했다. ‘초등영어’로 향토 문화를 표출하려는 노고(?)가 안쓰러웠다. 시대의 모토인 세계화의 ‘겉’만 흉내 낸 꼴이었다.

 세계화를 말할 때 한국사에서 추사 김정희에 견줄 만한 이도 드물 것이다. 그는 당대의 중심이었던 중국의 각종 필법을 연마하고, 추사체라는 고유영역을 열어젖혔다. 추사는 요즘으로 치면 최고의 검색형 학자였다. 중국 학자도 혀를 내두를 만큼 과거와 현재의 전적(典籍)을 독파했다. 오죽하면 추사 연구의 개척자인 일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는 추사를 ‘청조학(淸朝學) 연구의 제1인자’로 평가했을까. 세계의 ‘겉’이 아닌 ‘속’을 파고든 것이다.

 청백봉사상 실사를 마친 주말 경주에 잠깐 다녀왔다. 불국사·석굴암·첨성대 등에 눈도장을 찍은 다음 분황사 터에서 기대밖의 유물과 마주쳤다. 예전 수학여행 식 경주 유람에서 보지 못했던 것이다. 바로 ‘분황사 모전석탑’ 옆에 있는 ‘분황사 화쟁국사비부’다. 고려 숙종 6년(1101) 세워진 원효대사비의 받침돌로, 건립 이후 수백 년간 존재조차 잊혔던 유물이다. 금석학(金石學)에 정통했던 추사의 밝은 눈이 없었다면 원효의 자취는 잊힐 뻔했다. 성리학의 대의보다 실사구시를 추구해 온 추사의 진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추사는 지난해의 화두였다. 그의 타계 150주년을 기념해 굵직굵직한 전시가 줄을 이었다. 중국을 받아들이되 이를 넘어서려는 ‘글로벌 지식인’으로서 추사가 재조명됐다. 올해에도 그 열기는 계속되고 있다. 20일까지 과천시민회관에서 열리는 ‘추사와 한·중 교류전’이다. 한·중 수교 15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로, 지금 우리 사회의 화두인 ‘중국 바로 알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국내외 네트워크(인맥·학맥)를 총동원해 중국(세상)의 최신 동향을 익히려 했던 추사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전시품 가운데 ‘해외묵연초본’이 있다. 추사가 청나라 학자에게 보낸 수백 통의 편지 가운데 겨우 남은 것이다. 그중 한 대목. “천문(天文)과 산술(算術)은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 우리나라 사람은 대부분 치우치고 고루한데 천문과 산술에 있어서는 더욱 엉성합니다.” 철 지난 좌파·우파 갈등이 대선판을 휘두르는 지금, 천문·산술을 공약으로 내세운 이가 있다면 주저 없이 선택하겠다.

박정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